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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22,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야기. (3-2/5)

간천(澗泉) naganchun 2024. 11. 8. 02:55

22,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야기. (3-2/5)

==유명한 화가이면서 해부학, 기하학 등 많은 연구를 하였다.==

 

 

3) 밀라노 공국에서의 활약

다빈치는 30세 무렵(1482년경), 실의에 빠져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향했다. 당시 밀라노는 베네치아와 함께 강국이었으며,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1452-1508,미라노공/별명은 일 모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학자와 예술가, 기술자를 궁정에 두고 있었다. 다빈치는 군사 기술자로 자천하여 밀라노 공작을 섬기게 되었고, 때로는 음악가(리라 연주가)나 오락 담당자, 때로는 도시 계획가 또는 군사 기술자나 수리 공사 감독자로서 활약했다. 이 일들을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작성한 사고 노트는 나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기로 출판되었다.

 

4)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7년에 제작되었다. 예술가로서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의 선조를 기리는 기마상과 성 프란체스코 교회의 <동굴의 성모>를 제작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작품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 작품은 세로 4.2m, 가로 9.1m의 거대한 벽화로, 원근법이 도입되어 긴장감 있는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1498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했으며, 현재도 처음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상당히 손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곧 체포될 것을 알고 12명의 제자(열두 사도)를 초대하여 연 만찬을 의미한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때때로 성스러운 만찬을 여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어지는 나의 몸이다.>라고 말했다. 이 이후로, 빵과 포도주는 성체를 의미하는 <성찬>으로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의식이 되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때 예수는 이 중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예고했고, 제자들은 크게 동요했다. 예수를 배신한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는 그림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로, 배신의 보상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5) 이탈리아 전쟁

1499, 이탈리아 전쟁 중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했다. 그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작 중이던 대형 기마상의 청동은 급히 대포용으로 전용되었고, 이미 완성된 실물 크기의 모형은 프랑스 병사들의 사격 연습 표적이 되어 파괴되고 말았다. 밀라노는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고, 루도비코 일 모로는 도주하던 중 체포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6) 미켈란젤로와의 대결

밀라노를 떠난 다 빈치는 베네치아 등을 거쳐 피렌체로 돌아왔으며,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부활시킨 피렌체 공화국 정부로부터 1503년에 시청(팔라초 베키오)의 대강당에 벽화 <앙기아리의 전투>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때 같은 건물의 반대편 벽화는 후배인 미켈란젤로이탈리아어: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 이탈리아 르네싱스기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카시나의 전투>를 제작하게 되어 두 거장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미켈란젤로는 대작 <다비드상>을 작업 중이었으며, 젊은 나이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 두 사람의 경쟁은 다 빈치가 제작 기법에 고민하며 진척되지 않는 사이에, 미켈란젤로도 로마로 초청받아 두 작품 모두 중단되었고 결국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3년경에 모나리자의 제작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 모델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그려졌는지 등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기고 있었다. 이 그림은 약 4년 만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 빈치는 이 그림을 평생 손에서 놓지 않고 언제나 손질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갈 때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가지고 갔다. 현재는 연구가 진행되어 모델이 상인 리자 델 조콘도(조콘다 부인)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