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위, 카라칼라제(188년~217년)
루키우스 세브티미우스 팟시아누스(라텐어 ; Lucius Septimius Bassianus, 188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는 로마의 황제로서 세우엘스조의 군주로서 제2대 당주가 되었다. 본명보다도 카라칼라(Caracalla)라 불리는 경우가 많고 역사학자들도 이렇게 부른다.
세우엘스조의 초대군주 세브티미우스 세우엘스의 장남으로 로마 역사상에 남는 폭군의 한사람이다. 한편 전속주민에게 로마제국의 국민으로서의 권리 의무(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우스 칙령을 결정하고 결과적으로 로마영내에서의 민족, 인권에 따른 차별을 철폐한 것으로 알려진다. 달리 은화의 개주(은의 함량을 간하는 것), 대욕탕(카라칼라욕장)의 건설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도 존재한다.
단지 칙령의 목적은 역사가 갓시우스 데이오(라텐어 ; Lucius Cassius Dio Cocceianus, 155년(163년、164년 성이 있다.)-229년 이후. 로마의 역사가. 정치가)에 따르면 세수확대가 목적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고 있고 또 이점 이외로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다.(위키페디아)
로마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암군이면서 폭군으로 역사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나 카리규라, 곤모두수 등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대하여 폭정이 계속되어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마침내는 제국 내에 사는 전원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우책으로 로마의 근본을 파괴하여서 그 영향은 서서히 로마 내부에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폭군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동생 게타를 죽이고도 모자라서 광대한 로마영내에서 게타의 초상화 부분만을 지우도록 강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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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신에 대한 악담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집트에서 대학살을 하고 재산이 없어지면 남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이 써버리는 폭군의 교과서와 같은 생활을 하였고 최후에는 자신을 지키는 친위대에 의하여 살해되어 후세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봉(Edward Gibbon, 1737년 5월 8일-1794년 1월 16일, 영국의 역사가로 『로마제국 흥망사』의 저자이다.)으로부터는 <인류 공통의 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카라칼라제 사후 곧 50년 사이에 25명의 황제가 사거한다는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황제라 불리는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고대 로마는 암흑기를 맞이했다.
그러고서도 로마는 재흥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카라칼라제가 남긴 부체는 갚을 수가 없어서 진력했지만 서서히 로마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사로 보아도 굴지의 폭군이라 하니 않을 수 없다.
출처=www.myworldhistory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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