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위, 브르봉조 그늘의 실력자 <퐁파두르 부인><더 보기 2>
정치 관여하기
프랑스 국왕의 공식 애첩이 된 퐁파두르 여후작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를 매혹시키고 그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고 (하지만 그전 역대 프랑스의 어떤 왕의 여자보다 검소했다.) 여러 곳에 저택과 성곽 등을 건설하였으며(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 궁전은 그녀의 저택 중의 하나다), 이윽고 정치에도 참견하게 되어 약 15년간 권세를 누리게 된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추천을 받아 1758년 외무대신이 된 쇼아죌은 전쟁대신 등의 직위도 겸하여, 대략 10년에 걸쳐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중농학파 프랑수아 케네는 그녀의 주치의였다.
한마디로 퐁파두르 여후작은 프랑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그림자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퐁파두르 여후작은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교제와 취미
1756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와 교류하여 반(反)프로이센 포위망을 결성했다(7년 전쟁).
퐁파두르 여후작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학예 보호에 힘쓴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여후작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의 이러한 수집열은 각종 미술품의 생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퐁파두르 여후작의 입김이 여러 곳에 미치자 자연스레 그녀의 취향은 당시 유행의 기준으로 통용되었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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