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일본 이야기/일본 이야기

“한국은 나의 신앙의 조국”이라는 하나와(塙) 씨

간천(澗泉) naganchun 2009. 6. 30. 17:48

 

“한국은 나의 신앙의 조국”이라는 하나와(塙) 씨

 

 

 

내가 일본에 체일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 중에 참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예절이 바르고 정성이 있으며 만남에 솔직하고 진지함이 있었다. 그런 많은 사람 중에 또 한 사람이 이 ‘하나와’씨이다.

 

일본에는 국제승공연합(國際勝共聯合)이라는 친한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문선명의 통일교 멤버들로서 종교 활동과 반공활동도 함께 하면서 한국을 지지하는 단체이다. 내가 부임한 이바라기현 민단에는 이 멤버로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민단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대 일본인 단체와의 가교 역할도 하곤 한다. 내가 부임하자 먼저 찾아온 멤버도 이들이었고 부임해서 한 달포 쯤 후부터는 승공연합에서 한국어 강좌를 열게 되어서 매주 금요일에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들은 문선명의 퉁일교 신자이기 때문에 한국을 신앙의 조국이라 한다. 그들은 원리강론이라는 교의를 바탕으로 특이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찬미가는 기독교의 찬송가를 원용하고 있다. 나 또한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지 않아서 젊은 시절에 기독교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들과 어울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때로는 그들의 찬미가를 함께 부르고 그들이 요청에 의하여 우리 노래 페티김의 “사랑해” 같은 노래를 내가 불러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들 멤버 중에 교육원으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 중에 ‘하나와 게이코(塙)’라는 사람이 있었다. 대체로 일본 여성들은 깔끔하고 가냘픈 인상이 강한데 그녀는 수더분하고 풍만한 느낌이 드는 한국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순수한 일본인인데 어쩐지 한국인 여성으로 착각하게 하는 인상이다. 그녀는 열심히 교육원 출입을 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려 노력하는 편이며 내가 하는 일도 돕고 싶다고 한다. 시간이 가고 친근해지면서 어느 여름에는 우리 애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기를 청했더니 선선히 받아들여서 시립수영장에서 연습을 시키곤 하였었다. 그리고 한국의 김치를 먹고 싶다고 하여 내자는 해마다 김치를 담가서 그들의 합숙소에 보내기도 하였었다.

 

내가 귀국하고서도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한 번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은 바가 있다.

 

저는 10월에 사토(佐渡)에 갔었습니다.

섬을 일주했습니다만, 사토 금광에서의 광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어쩌면 그럴까요. 20대에 많이 사망하여 40세면 장수하는 편이라 합니다.

그것은 매일 광산 속에서만 일을 해서 햇볕을 받지 못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산 속에는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납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만 가슴이 아픔을 느꼈습니다.

또 사토 섬은 38도선이 통과하는 곳이라는 데서 한국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도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저도 새로운 80년을 맞기 위하여 심정을 정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1981년 가을에 학생들과 설악산 여행을 하고 밤늦게 돌아왔더니 하나와 씨가 서울에 와 있다는 전화가 있었다 한다. 밤늦게 전화를 했더니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 투숙했는데 이번에 서울에서 통일교 회원 500쌍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어서 혼례식을 치르러 왔다는 것이다, 예식을 올리고 남녀가 따로따로 서울 관광을 하기로 되었는데 내일 시간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 근무처 사정으로 오전에 출근하고 말미를 얻어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서울 구경을 시키기로 하였다.

그녀가 가보고 싶은 곳은 용인 민속촌이라고 했다. 일행은 그녀를 비롯하여 4명이었다.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하여 민속촌을 관광시켰다.

 

그녀는 이제 결혼을 하였는데 남편은 ‘하나야(花谷)’ 씨이므로 앞으로는 ‘하나야 게이코’가 된다고 하면서 결혼사진을 보여주었다. 통일교의 방식에 따라 앞으로 1년간은 따로따로 활동을 하고 1년 후에는 남편의 고향인 구레시(吳市=일본 히로시마현에 있는 일본군 군항으로 유명한 군항 도시)에서 신접살림을 꾸리게 된다고 했다.

 

그 후로는 만날 수 없었지만 그녀도 지금은 50대 중반의 부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은 나의 신앙의 조국이라고 하면서 신앙심으로 우리 가족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그녀를 잊을 수 없다.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