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0년 전의 손대지 않은 무덤을 발견
-황금 부장품도- 이스라엘에서
1, 3600년 전의 왕가 무덤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고대 가나안의 도시국가 메기도에서 3600년 전의 왕가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손대지 않은 무덤에 많은 재보가 잠자고 있을 뿐 아니다. 고고학자들이 흥분하는 것은 기원전 15세기 초에 이집트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요한 땅을 다스리던 왕조에 대하여 새로운 발견이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메기도(megido)는 하이파(Haifa)에서 남쪽으로 30Km, 현재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 전 3000년부터 서기 1918년까지 5000년 가까이 전략적인 요충지이고 교역로이기도 하였다. 이스레루 계곡(en:Jezreel Valley)을 내려다보는 이 장소는 역사를 바꿀 만한 결정적인 전쟁을 수없이 목격하여 하루마게돈(Armageddon、최종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루마게돈이란 히브리어로 <메기도의 언덕(Har-Meggido)>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성서의 묵시록에 처음 나타난다.
무덤이 있는 자리
기록에 남는 메기도 최고(最古)의 전쟁은 기원 전 15세기 전반, 이집트의 파라오, 도도메스3세에 의한 진군이다. 이집트군은 요새도시인 메기도를 7개월간 포위를 지속하였다. 그 결과 고을은 파라오에게 항복하고 가나안은 이집트와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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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금의 목걸이와 황금의 관
메기도 (현재명은 데르 엘 무테셀림/Ter El Mutecelim)에서는 115년 전부터 과학적 조사가 실시되고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대학의 이스라엘 핀켈스타인((Israel Finkelstein)씨와 마리오 마틴(Mario Martin)씨와 W, F,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고고학연구소의 마슈 아담스(Matthew Adams)씨가 이끄는 국제조사단이 1994년부터 메기도에서 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기원전3300-586년경)에 걸쳐서 궁전이나 신전, 마을의 성벽 등의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 장소는 현재 세계유산의 일부로 등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번 무덤 발견은 고고학자들마저 예상하지 않았다. 시대는 기원전 1700-1600년경의 중기 청동기시대의 끝 무렵이다. 강력한 도도메스군에 의하여 왕조가 멸망하기 전 메기도의 고을의 전성기였던 무렵의 것이다.
발견된 계기는 어느 기묘한 현상이었다. 1930년에 발견된 궁전의 바로 옆에서 지면에 균열이 생긴 것에 고고학자들이 마음을 쓰게 되었다. 무엇인지 보이지 않은 공동에 지하의 구조물이 모래가 함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고 아담스(Adams)씨는 돌이킨다. 그래서 2016년 마침내 그 원인이 밝혀졌다. 매장실에 이어지는 지하회랑을 발견한 것이었다.
부장품-금속공예품
매장실에는 3명의 유체가 묻혀있었다. 8-10세의 아이, 30대 후반의 여성, 40-60세의 남성으로 모였다. 유체는 어느 것도 손대지 않아서 가락지, 브로치, 팔지, 장식 핀 등의 금은의 보석장식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남성의 유체에는 황금의 목걸이와 황금의 관이 입혀 있었다. 보석장식품은 어느 것이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직공이 제작한 예술성이 높은 것뿐이었다.
고고학자는 무덤이 왕궁 바로 가까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구조물의 크기, 사치스러운 부장품, 그리고 왕궁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꾀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었다.>고 핀켄슈타인씨는 말한다.
부장품을 보면 메기도가 당시 국제적인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지중해 동부의 주요교역로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기한 외국의 물품이 수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덤에는 보석장식품만이 아니라 키프러스제의 도자기나 이집트에서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 항아리도 수장되고 있었다.
3, 왕가의 무덤 속?
유체가 몸에 지니고 있는 고가의 장식품은 메기도사회가 고도로 계층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매우 유복하고 영향력이 있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상층부에 군림하고 있던 사회이다.
연구자들은 이런 부장품만이 아니라 유체 그 자체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고 있다.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동안에 3명의 유체가 매장되기 전에 같은 장소에 다른 유체가 매장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이 지역의 고대 매장 의식에 밝은 멜리싸 클라디크(Melissa Claddick)씨는 무덤에 매장이 2 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단기간에 적어도 6 명이 묻힌 후 새로 숨진 3 명이 매장되었다. 그러나 그 때 먼저 6 명의 유체는 무덤 속에 밀려 지저분한 뼈 더미가 생겼다. 그리하여 빈 무덤 앞에 3 명의 유체가 매장되었다고 한다.
부장품-목걸이 물새공예품
부장품-금속공예품
앞의 3 명의 유체는 움직여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청동 구슬 발목이나 철제 핀과 같은 몇 가지 보석장식품은 무덤의 뒤쪽에 밀려져있는 뼈 더미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또 같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데서도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매장 된 3 명은 사회적으로 특히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부장품의 수도 많고 매우 호화스러운 물건이 매장되어 있었으니까. 또 먼저의 6 명처럼 유체도 건드려지지 않았다.>고 클라 디크씨는 지적한다.
다시 생물고고학자인 레이첼 카리샤(Rachel Karisha)씨가 유골을 분석 한 결과 두 그룹의 여러 사람에게 뼈와 혈액의 유전적 이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를 찾을 두 그룹의 사람들이 혈연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4, DNA 분석으로 밝혀지는 미스터리
메기도는 이번 <왕가>의 무덤보다 간소한 매장지도 여러 개 발견하고, 거기에서도 수많은 인골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그 뼈의 광범위한 DNA 분석이 진행 중이다.
그 결과가 나오면 가나안 도시국가에 살고 있던 일반인들과 지배자 층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 질 것이라고 핀켈슈타인 씨는 기대한다.
연구자가 특히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메기도의 지배자층 출신이다. 도도메스 3세에게 정복 된 후,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 사이에 교환된 외교기록을 보면 당시의 메기도왕은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적인 셈어 이름이 아니라 후르리어의 비리디아 (Furri Viridi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후르리인은 산에 사는 민족으로 이 지방에는 기원전 4천년에서 3천년 사이에 들어와서 이윽고 정착하고 설형문자를 채용 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후르리인 마을을 발굴 해 보니, 그들은 이미 진보한 문화와 독특한 언어, 신앙체계를 가지고 중동에서의 가장 초기 마을이나 도시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메기도의 DNA 해석이 종료되면 가나안의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후르리인의 한 역할이 처음으로 밝혀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변화 할지도 모른다.
<이 연구는 성서의 세계가 시작되기 훨씬 전의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핀켈슈타인 씨는 말한다.
출처=(2018. 8. 3 내셔널지오그래피 일본어판에서)
글 = Philippe Bohstrom / 번역 = 루버 아라이 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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