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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슈메르인-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원

간천(澗泉) naganchun 2017. 6. 9. 06:07




수수께끼의 슈메르인-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원


 

세계 4대문명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이라 하여 태음력, 설형문자 60진수법 등을 생각해낸 것으로 유명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데 그들은 어디서 왔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스스로를 <섞인 것>이라고 부른 듯하고 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원

 

기원전 5천 년경 후에 메소포타미아라 불린 유프라테스강 연안지대에 한 농경민족이 정착하였다. 그들이 정착한 땅은 경작이나 방목에 적합하고 가까운 습지대에는 고기나 새가 항상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생활하기에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그 농경민족은 우바이드인이라 불리고 그 후 천 년 이상이나 거기서 살며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도시나 신전을 만들고 그 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만든 민족이다. 그들의 유능하고 진취적인 기질은 이윽고 이 땅을 중근동에서 가장 번영한 지대로 올려놓았다. 단지 그들은 문자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3800년 경 어디서인가 슈메르인이라는 민족이 와서 믿을 수 없는 대변화를 일으켰다. 문명의 일대 브레이크라 할 현상이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의 땅은 잠간 사이에 전례가 없는 대번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공전의 정치권력이 수립된 것이다. 그것은 미술, 건축, 종교와 사회기구, 일상의 세세한 관습에서 설형문자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든 그들 슈메르인이 이룩한 획기적인 위업이었다. 세계 최초라 할 수 있는 선박이나 수레가 달린 전차 등도 이 무렵 슈메르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에리두, 우루, 우루쿠, 라가슈라는 고도의 도시국가를 차례차례로 만들었다. 그것들은 도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 문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설형문자 이외로 태음력, 7요제, 60진법을 낳고 달력과 함께 점성술도 발달, 금속의 연단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쳐 양 문명의 교역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슈메르인의 수수께끼

그들은 스스로를 <섞여 합쳐진 자>라 부르고 자신들은 <아눈나키>라는 신들의 집단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것 같다. <아눈나키는 금을 채굴하기 위하여 다른 별에서 지구에 찾아왔다.> 고 믿고 있었다고 하고 슈메르인의 고대 신화를 <아눈나키는 금을 채굴하는 노동자를 구하기 위하여 유전자 조작으로 슈메르인을 만들어 내었다.>고 해석하는 고대우주비행사설을 지지하는 자가 있다고도 한다.

 

어디서 왔는가.

제카리아 시친에 의하면 이 태양계에는 10번째의 <니비르>라는 혹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슈메르의 점토판을 상세히 해석하여 이 결론에 이르렀다. 혹성 니비르는 공전주기가 약 3600년으로 지적생명체 <아눈나키>가 고도의 문명을 구축하고 있다. 아눈나키는 지구에 접근 했을 때 지구에 비래하여 우리들 인류를 유전자 조작하여 원인으로부터 새로 창조 하였다.

현재 많은 과학자는 우주 전체에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확률은 배우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단지 그 생명체끼리가 조우할 확률은 거의 0이라고 한다. 제카리아 시친의 가설에 따르면 지구 인류와 아눈나키는 조우한 것이 아니라 아눈나키가 자신들과 비슷하게 만들어 낸 생명체가 지구 인류라는 것이다. 성서이 창세기에 있는 <신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들었다.>라는 기술이 실제로 행해진 것이다.

 

문자

문자는 상형문자를 발전시킨 설형문자를 창시하고 후세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러 가지 언어를 표현하는 데 이용되어 기록매체는 점토판이 시용되었다. 설형문제자 의하여 적은 것으로는 함무라비법전이 잘 알려져 있다. 말하던 언어는 외교용어로서 사용된 듯하여 이집트 문명의 외교문서는 이 말을 적은 것이 남아 있다.

 

60진법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발달한 슈메르문명은 60진법에 바탕을 둔 정연한 도량형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정치한 체계는 이집트에 건너가고 또 바빌로니아나 앗시라아를 경유하여 고대 그리스 문명에도 계승되었다.

 

발달한 천문학 태음력

천문학이 발달한 것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하 계절이나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또 디크리스 유프라데스강의 범람의 시기를 알기 위하여 필요하였다. 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여름은 덥고 괴로움으로 사람들은 시원함을 얻기 위하여 밤에는 집 옥상에서 자고 있었으므로 밤하늘을 잘 관찰할 수 있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먼저 1월인데 태양이 뜨고 지고 다시 뜨는 것이 기본 단위이다. 밤하늘의 가장 큰 별은 달이고 만월이 되거나 초승달이 되거나 하여 변화가 크므로 슈메르인들은 달의 변화로 시간을 아는 달력을 만들었다. 이것이 태음력이다.

신월, 상현달, 만월, 하현달이 하나의 사이클이 되어 그 변화의 사이가 약 7, 이것이 4회가 있으므로 1개월은 28일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날에 수호성(守護星)을 붙인 것이 일(태양), (),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고 이 7일을 한 단위로 하여 1주간으로 요일이 생각해 내어진 것이다.


 

정치 경제

무역의 교역 범위는 확대하여 이집트문명이나 인더스문명과의 교역도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슈메르나 바빌로니아에서는 먹을 것을 비롯하여 필수품을 저장하여 궁전이나 도시의 문에 두고 분배하고 바자로 수공업품의 판매를 행하였다. 다무가르무라 하는 신분형의 교역자가 존재하여 중매인, 대리인, 경매인, 보관인, 은행가. 중재인, 여상인, 노예취체관, 징세리 등을 담당하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대외시장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규로스2세는 그리스인의 시장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였다. 또 함무라비법전에는 손해배상, 부채취소, 보수, 등가개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도시국가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가 해해져서 인민이나 노예를 지배하는 계급사회가 되었다. 왕에게는 막대한 부가 모이고 대규모의 치수나 관개, 혹은 장대한 신전이아 궁전이 만들어졌다. 길가메시서사시에 등장하는 길가메시는 기원전 2600년 경 슈메르인의 왕이었다.

 

길가메시서사시

길가메시왕의 모험 이야기, 여신 이슈탈의 유혹을 물리치고 불사의 약초를 구하기 위하여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구양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홍수 기술도 있다.

 

유전자 조작을 이해하고 있었다.

길가메시서사시 중에 유전자조작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기술이 있다. 길가메시 본인이 <나는 반신반인으로 피의2/3가 신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신과 인간의 반이라면 1/2이 신이 된다...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고대인은 유전자적인 지식이 없어서 위와 같은 틀린 표현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유전자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길가메시서사시에 적힌 것이 바르다고 생각되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미토콘토리아 DNA라는 어머니에게서 그대로 받아 이어지는 DNA가 발견된 것이다. 보통의 DNA는 아버지의 DNA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DNA를 반씩 가지는데 이 미토콘토리아 DNA는 아버지의 DNA가 섞이는 일은 없고 어머니의 DNA가 그대로 받아 이어지는 것이다. , 어머니의 DNA2로 아버지의 DNA1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길가메시는 여신과 인간의 반이므로 <피의 2/3이 신이다.>라는 것은 바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식량부족, 목재부족에 의한 멸망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모든 것에 나무를 썼다. 빵을 굽는데도, 벽돌을 굽는데도 불을 썼다. 그래서 나무를 사용하였다. 또 고대문명의 싱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신전이나 궁전을 짓기 위하여 대량의 목재를 필요로 하였다. 교역선이나 전투용 선박도 목재로 만들었다. 이집트에서는 최근 피라미드 부근에서 거대한 선박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고대문명의 자원은 분명히 목재였다.

그런데 이 세대의 기후는 매우 건조하였기 때문에 강수량이 적고 토양 중의 염류가 차차 농도를 진하게 하였다. 슈메르인은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목재를 조달하기 위하여 하류에서 중류, 상류로 유출하기 시작하였다. 건조에 의하여 염분이 높은 토양이 유출하고 연해가 진행되어 관개용수로가 막히는 등 농작물 수확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발전은 인구 증가와 비례하므로 여기서 식량 부족이 일어난다. 그에 더해서 생활의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목제 자원도 부족하므로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망했다고 한다.

 

셈족의 침략으로 인한 멸망설

슈메르는 4000년 전에 셈족에 의하여 망했다. 4380년 전에 슈메르 도시국가에 셈족이 침입하였다. 셈족이 아카드를 건국했다. 4200년 전에 슈메르가 다시 되찾지만 4000년 전에는 셈족이 바빌로니아를 건국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은 절멸하고 그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셈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슈메르인은 그들의 식민지인 인더스에 흘러갔다.(슈메르와 인더스가 빈번히 교류한 것을 생각해도 인더스문명이 있었던 현재의 파키스탄은 왕래가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이 슈메르인과 인도 원주민의 근원 몽고로이드의 혼혈이 드라비다인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드리비다인은 인더스문명을 버리고 확산해갔다. 학설에는 인더스문명 소멸의 이유는 건조화설이나 홍수설로 아리아인에 공격당한 것이 아니라는 설이 주류인데 또 한편에 남는 다음 사실은 버려진 상태로 있다. *

출처=http;//www.trend--r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