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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21, 빌헤름 콘라드 뢴트겐 이야기(3/4)

간천(澗泉) naganchun 2024. 10. 30. 03:17

21, 빌헤름 콘라드 뢴트겐 이야기(3/4)

==x선을 발견하여 물리학, 의학, 산업계에 크게 공헌했다.==

 

 

3, 발표 후의 반응 및 그 이후

 

X선 사진이라는 직관적으로도 매우 이해하기 쉬운 결과가 수반되었고, 또한 그 이전의 연구로 인해 뢴트겐이 물리학 분야에서 일정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발표는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1896114일에는 영어판이 일찍이 네이처(Nature), 이어서 124일에는 일렉트리시언(Electrician), 214일에는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되었다. 프랑스어판도 28일에 L'Eclairage Electrique에 게재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3일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앞에서 X선 사진 촬영 시연을 했다. 123일에는 뢴트겐의 고향인 뷔르츠부르크에서도 강연회와 시연을 진행했다. 덧붙여, 뢴트겐은 발표를 매우 꺼렸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강연회였다고 전해진다.

 

해외에도 정보가 빠르게 전해져, 발견 후 3개월이 지난 325일에는 구제 제1고등학교의 교수 미즈노 토시노조(水野敏之丞)에 의해 일본의 과학 잡>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투시(透視)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극장에서의 X선 오페라 글라스(opera glasses/쌍안경) 금지 조례>29일 트렌턴에서 가결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1900년에 X선과 관련된 논문을 두 편 더 발표한 후, 뢴트겐은 뮌헨 대학교로 옮겨 실험물리학의 주임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동료로 막스 폰 라우에(독일어: Max Theodor Felix von Laue, 1879-1960, 독일의 이론물리학자)가 있었으며, 그는 1912년에 X선 회절상을 촬영하여 X선이 전자파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X선의 정체는 그동안 미스터리였지만, 투과성이 높은 X선의 발견은 즉시 X선 사진으로 의료에 응용되었기 때문에, 이 공로로 1901년에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었다.

 

뢴트겐은 1920년까지 뮌헨 대학교에 재직했지만, 이 기간 동안 그가 쓴 7편의 논문은 결정의 압전 효과 등 X선과는 관련이 없는 주제였다. 참고로, 1919년에 그의 아내가 사망했다. 뢴트겐은 과학의 발전은 모든 사람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X선과 관련하여 특허 등으로 개인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았으며, 독일의 치명적인 인플레이션 속에서 암으로 인해 1923210일에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 상금 역시 전액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 기부했다. 그의 묘는 기센의 구 묘지(Alter Friedhof)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