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복(福)이란 무엇일까?
과연 복이란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현실적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복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첫째는 건강함이요. 둘째는 늙도록 배우자가 함께 있는 것이요. 셋째는 재물이 있어서 남의 신세를 지지 않은 것이요. 넷째는 일거리가 있어서 일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요. 다섯째는 뜻이 맞는 벗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오복을 다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아무도 그렇다 하고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모자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욕심이고 희망 사항일 뿐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우리 동양에는 옛날부터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다. 곧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이라고 했다.
첫째는 수(壽) 곧 장수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富) 곧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요, 셋째는 강녕(康寧) 곧 건강해서 마음의 평안함을 지니는 것이요, 넷째는 유호덕(攸好德) 곧 덕스러움이요,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 곧 편안히 천수를 누리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풀이한다.
이것은 서경의 주서에 나오는 오덕이다.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얘기들은 매우 계급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목표를 일반 서민들에게 이 다섯 가지의 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정치가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곧 오복이란
첫째는 수(壽)이다. 수란 효제의 도덕을 지켜서 수명이 길어지는 것을 말한다. 곧 장수라 하면 좋을 것이다.
둘째는 부(富)이다. 부란 천자의 덕이 백성에게 미쳐서 항상 풍작을 이루어 부함을 말한다.
셋째는 강녕(康寧)이다. 강녕이란 나라가 평안하여 전쟁이 없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유호덕(攸好徳)이다. 유호덕이란 도덕을 논하고 사례를 들어서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이다. 고종명이란 시이를 따라서 할 일을 다하고 수명을 다하여 선덕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위정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어느 새인지 일반 서민의 지닐 복이라고 해석되어왔다.
생각해보자.
그 중에 수, 부, 강녕은 이해하기가 쉽다. 사람은 누구나 알맞은 나이가 들도록 장수해야 복이 될 것이고, 물론 장수하려면 건강은 필수 조건이다. 그 위에 강녕은 마음이 편안함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적어도 의식주에 곤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해야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호덕(攸好德)에 대해서는 단순히 덕을 좋아한다고만 해서는 풀이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여유를 가지고 덕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삶을 말한다. 덕이란 득(得) 곧 얻음을 말한다고 한다. 얻고 베풀고 하는 삶이 덕을 좋아하는 삶이다. 얻기만을 좋아하고 베풀지 않은 삶에는 덕이 따라올 이가 없다. 그 다음 다섯째로 말하는 고종명(考終命)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다할 때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일생동안의 삶이 죽음에 임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란 오래 살면 상수100세 이상 살기도 하고 중간이면 80세, 적으면 60세까지 살기도 하고 60을 채우지 못하고 젊어서 죽는 사람도 많다. 변고를 당하지 않고 주어진 목숨을 다하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 장수하면서 건강하고 부해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느끼지 않고 좋은 일을 하면서 천수를 다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 말은 잘산다는 뜻인 듯한데 이에 반하여 <웰다잉>이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잘 죽는다.>는 말이다.
원래 한국인은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여 미리 수의를 만들고 심지어는 관을 준비하기도 하며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기도 하였다.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즘은 죽음학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가 생겨서 삶도 중요하지만 죽음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소생할 가망이 없는 말기 암환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암치료를 하며 고통을 견디다가 혼수상태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라. 죽음이 목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고요히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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