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여성

스파이로 생을 마친 마타 하리(Mata Hari, Netherland 1876~1917)

간천(澗泉) naganchun 2023. 7. 26. 03:30

 스파이로 생을 마친 마타 하리(Mata Hari, Netherland 1876~1917)

 

마타 하리

 

마타 하리(Mata Hari) 네덜란드의 무희이다. 1차 세계대전 전야 파리의 무랑루쥬에서 인기를 모은 무희였는데 독일 스파이라 하여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마타하리(Mata Hari)는 예명으로 말레이시아어로 <태양의 눈>이라는 뜻이라 한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Margaretha Geertruida Zelle/1876-1917이다. 여자스파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출생과 성장

 

네덜란드 후리스란도주 레완덴에서 암스텔담 태생인 아담 세르(1840- 1910)와 후리스란도계 조상을 가진 어머니 안데. . 데르. 무렌 사이에서 4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유산업에 투자하여 성공을 거두고 가게를 가져서 마가레타는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Margaretha Geertruida Zelle로서 그녀는 13세까지 좋은 상급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마루하레타의 아버지는 1889년에 파산하고 그 후 양친은 이혼하였다. 마루하레타의 어머니는 1891년에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재혼하여서 가족은 이산되었다.

마루하레타는 자신의 후견인 히어 비서(Heer Visser)가 라이덴으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마루하레타는 유치원 교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학장과의 사이에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서 그 시설에서 쫓겨나 숙부의 집으로 피난하였다.

 

결혼과 이혼

 

19세 때에 신문 광고에 신혼 상대를 구하는 광고가 있었다. 응모조건은 양가의 딸이라 했는데 그녀는 양가의 딸은 아니지만 젊음과 용모에 자신을 가지고 응모하여 네덜란드 식민지에 근무하는 장군 루돌프와 결혼하여 식민지 인도네시아 자바에 가서 살았다.

네덜란드 식민지 자바에서 그녀 부처는 많은 사용인에게 둘러싸여 화려한 사교생활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들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그녀의 부부생활은 악화하고 결국 이혼하여 본국으로 귀환해야 하게 되었다.

 

무희와 스파이

 

귀국한 그녀는 파리에 가서 우연히 술자리에서 자바에서 보았던 무용을 보여주었더니 반향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무희로서 데뷔하였다. 190529세 때였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살롱에서 시작하여 작은 홀, 그리고 대극장으로 활약하는 장소를 넓혀갔다. 그리고 예명으로 <마타 하리>라 하고 자신은 자바의 무희라 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두르고 나체와 거의 비슷한 요염한 무용을 차례차례로 발표하였다.

그 때의 예명이 <마타 하리(Mata Hari)>로 이는 <태양> 또는 <태양의 눈>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진기한 것을 좋아하는 파리장의 마음을 붙잡아 그녀는 마음 내키는 대로 화려한 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차츰 그녀의 거짓말이 들통이 나서 무용은 피하게 되고 그 미모도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다. 무희로서의 명성에 프랑스 장교, 독일 장교 등 많은 애인을 사귀게 되었었다. 그것이 스파이 H21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타 하리는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프랑스 장교 또는 독일 장교와 침대를 함께 하면서 국제적인 음도의 도구가 되고 있었다. 더욱이나 마타 하리의 첩보활동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체포와 처형

 

1917년에 그녀는 프랑스에서 이중 스파이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독일인 및, 프랑스인 사병을 죽음으로 이르게 하였다는 용의로 기소되었다. 그녀의 체포는 독일주재 스페인무관이 마타 하리를 암호명 H-21인 독일 스파이라는 통신이 프랑스에 의하여 해독된 것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전황은 프랑스로서 불리했고 프랑스 정부로서 모든 군사상의 실패를 마타 하리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매우 형편이 좋았다.(수송선이 유보트에 침몰된 것도 그녀의 작용이었다고 했다.)

19161015일 월요일 파리 교외 반센스 숲에는 흙무더기 언덕이 만들어지고 한 가지 의식과 함께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 들은 디귿자() 모양의 대열을 짓고 포병대, 기병대, 보병대가 삼열횡대를 짓고 자그마한 하나의 나무를 삼 방면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이윽고 기병대의 경호를 받으며 3대의 마차가 서서히 나타났다.

중앙의 한 대의 마차에서 짙은 감색 코트를 걸치고 벨이 달린 모자를 쓴 여성이 진흙을 조심스레 내려섰다.

<마루가레타 게루도루트 셀. 3군법회의의 재판에 따라 스파이 죄로 사형에 처한다.>

재빠르게 병사들은 마타 하리를 나무에 묶기 위하여 달려들었다.

<그물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몸에 팔을 두르지 말아주세요. 눈가림은 좋습니다.>

세계에 유명한 여자 스파이 마타 하리는 41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다지 스파이로서 활동한 증거는 없었지만 총살형에 처해지고 전설적인 미모의 여자 스파이가 되었다.

나체를 들어내기도 서슴지 않았던 마타 하리였으나 절대로 브라자민은 벗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 하면 그녀의 가슴은 처져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화

그녀는 유죄가 되고 산라자루형무소에서 10월 1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마타 하리는 프랑스군 및 독일군에게 매우 저급 레벨의 첩보요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녀가 독불 어느 진영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는 정보를 가져온 증거는 하나도 없다.

재판, 처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재판할 때 처형을 피하기 위하여 임신하고 있다고 지원자들이 신고할 것을 권했으나 본인이 거부했다. 처형할 때 총살대는 마타 하리의 미모에 매혹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눈가리개를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정확히 그녀를 저격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된다. 다시 총살 병사들에게 키스를 던졌다. 혹은 총살 직전 롱코트를 앞으로 재치니까 전 신이 나체인 채로 총살되었다. 는 등의 일화가 있다.

처형 전의 마타 하리는 태연자약해서 람주 한 잔을 받았지만 눈가리개나 나무로 묶이거나 하는 것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는 다시 의문스러운 것이 있어서 피에르 드 모리삿구라는 청년이 총살부대에 뇌물을 보내서 총에는 공포를 쏘도록 계획되었었는데 실제로는 실탄을 발사해버려서 그 청년의 기획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푸치니의 오페라 <도스카>에서 얻은 힌트라고 하는 말이 있다.

<브레타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마루가레타. 헤드로이다. 마크레오도라고도 불리어 무대에서도 <레디 마크레오도>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마타 하리의 생가는 미용원으로 사용되었었는데 2013년 10월 19일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위키페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