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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관음죽이 꽃을 피웠는데--.

간천(澗泉) naganchun 2009. 9. 4. 04:43

관음죽이 꽃을 피웠는데--.

 

 

 

화분에서 10년 여 동안 가꾼 관음죽이 꽃을 피웠다. 사슴의 뿔 같은 모양의 연분홍 줄기에 베이지 색의 작은 가지를 펴고 좁씨 같은 자그만 꽃이 피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기로는 관음죽은 관엽식물로서 그 광택이 나는 잎이 좋아서 선호함을 받는 식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꽃을 보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조사를 해보니까 관음죽은 몇 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하는데 아마도 내가 가꾼 관음죽은 이제 꽃이 필 고비를 맞은 것인가?

 

내자는 희귀한 꽃이 피었으니 상서로운 징조라고 퍽 좋아하고 이웃에 자랑을 하곤 한다. 해방이 되던 해의 일이다.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 학교의 총동원령에 의하여 어린 초등학교 학생인 우리들이 농지를 개간하고 고구마를 재배하여 그 소산을 학교에 바쳐야 하게 되었다. 우리들 같은 동네 아동들 8명이 100평 정도의 땅을 개간하여 고구마를 심었었다. 여름 어느 날 그 고구마 밭에는 메꽃 같은 연분홍의 고구마 꽃이 피었다. 매우 예뻤었다. 동네 노인에게 여쭈었더니 세상이 바뀔 징조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없어서 일본 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은 일이 있었다. 이 고구마 꽃도 보기 드문 꽃이다. 같은 해에 우리집 텃밭에 있는 대나무 밭에도 대나무 꽃이 핀 일이 있었다.

관음죽이 꽃핀 것은 과연 길조일까

 

그런데 생물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꽃을 피우거나 알을 낳고 쇠퇴기를 맞는다 하는데 아마도 이 관음죽은 수명이 다하는 것이 아닌가? 번식함은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쇠퇴하여 고갈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을 주고 잎이 광택이 나도록 먼지를 닦고 거름을 주곤하며 알뜰히 가꾸었는데--.

해방이 되던 해에 꽃을 피웠던 우리집 텃밭의 대나무는 점점 수세가 약해져서 잘 자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연실(練實)이라는 대나무 열매는 3천 년이나 5천 년에 한 번 열린다 하여 영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한다. 인간은 3천년이나 5천년을 사는 수가 없으니 대나무의 열매 연실을 볼 수는 없을 터이고, 어쩌다 그 때에 살았던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영광일지 모른다. 그러니 전설처럼 전해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남아메리카 페루의 안데스 산 고산지대에는 100년에 한 번 피는 푸야 라이몬디(Puya Raimondii)라는 희귀한 식물이 있는데, 사막에 자라는 파인애플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나무줄기만은 4-5미터 정도인데 가시가 돋은 기다란 잎이 방사형으로 뻗어 직경 4미터 정도의 둥근 모양을 이루고 척박한 산에 자란다 한다. 그것이 꽃을 피우게 되면 한 달 사이에 6미터나 되는 꽃대를 세우고 1만 개가 넘는 하얀 꽃을 일제히 피우고 이 꽃이 시들고 나면 그 식물 자체도 시들어 죽어버린다고 한다. 한 달 사이에 6미터나 되는 꽃대를 내는 데는 적어도 100년의 세월을 견디고 정력을 쌓은 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칠십여 년을 살아온 나는 어떠한가?

 

나는 인생은 강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산속의 이곳저곳에서 모아들인 옹달샘 같은 수원이 마치 어려서는 저수지처럼 물을 채우고서는 점차 개울을 이루고 시내를 이루어 큰 강의 상류의 물이 된다. 저수지가 되는 옹달샘은 깊을수록 좋고 거기에 물이 많이 찰수록 좋다. 차고 넘치는 물은 돌돌돌 자그만 여울소리를 내며 개울이 되고 점차 시내를 이루며 큰 강의 상류가 되는 것처럼 인생의 20대는 질풍노도 같은 골짜기로의 여울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치기도 하였다. 이 강물은 중류에 이르러 더 넓은 세상에서 이골 저골에서 모여드는 물들과 한데 어울려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흐른다. 강가의 물풀들을 키우고 고기를 키우기도 할 것이고 쪽배를 띄우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월은 물과 같다고 하듯이 세월이 가는 데 따라 물은 하류로 모이게 될 것이다. 때로는 폭포를 이루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수 백길 밑으로 낙하하기도 하고, 둑을 넘어서 홍수를 일으키기도 하고, 큰 물고기를 키우며 큰 배를 띄우기도 한다.

 

이처럼 나도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관음죽이 나이가 차서 꽃을 피우고 쇠하듯이 나 또한 그런 고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적어도 한 번쯤은 꽃을 피워야 할 터인데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만 먹고 살았는가.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질 신세란 말인가. 참으로 허무하기 한이 없다.

과연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막 강 하류에 이르러서 아무런 구실을 못하는 신세가 된다 하더라도 장차 심해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청정하고 영양이 풍부하며 언제나 변함이 없는 상태인 심층수가 되리라. 그리하여 수 백 수천 년 후에 끌어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심층수가 되리라 하고 꿈꾸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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