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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고대인도 사상과 종교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 26. 05:14

 

고대인도 사상과 종교 이야기

 

 

 

 

1) 우파니샤드 철학의 출현

 

바라몬교는 의식(儀式)중심주의 종교였다. 의식의 방법은 비전(秘傳)이라 하여 바라몬 신분인 사람에게만 전수되었다. 그런데 이 의식만으로는 싫증이 난 사람들이 밀림 깊은 곳에 숨어서 진리를 탐구하였다. 곧 내면추구이다. 여러 가지의 고행을 하면서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서서히 만들어진 철학이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梵)이다. <우파니샤드>란 <오의(奧義)의 서(書)>라고 번역하고 있다. 곧 내면 깊숙이 진리를 말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우파니샤드> 철학이 후의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곧 인도 사상의 출발은 여기에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인간의 생사에 대하여,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회답은 윤회전생이다.

모든 생명은 생과 사를 영원히 되풀이한다. 죽으면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고(苦)라고 생각했다. 기근, 역병, 전란, 천재 등 모든 불행이 인생에는 따라다닌다.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죽은 다음에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가? 이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행한 바로서 결정된다. 살아있는 동안에 한 행위가 곧 업(業)이다. 어떤 업을 쌓았는가에 따라 다음 태어남이 결정된다. 나쁜 업을 쌓으면 벌레로 태어날는지 모른다. 좋은 업을 쌓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곧 인간으로 태어나면 역시 인생은 고이니까 사람들의 바라는 바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빙빙 도는 윤회의 수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고의 소원인 것이다. 이렇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 한다.

윤회전생과 업 그리고 해탈 이것이 첫째의 포인트이다.

둘째는 우주의 진리에 대해서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우주의 근본 진리, 근본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범(梵)이라고 번역한다.

당연히 수행자들은 이 진리 <브라흐만(梵)>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고 붙잡고 싶은 것이다.

이 우주의 진리란 유태교나 기독교에서는 신이라 생각하고 플라톤은 이디아라 생각했다. 기독교나 유태교에서의 신이나 플라톤의 이디아는 멀리 있어서 인간은 그게 향하여 조금씩 다가간다고 생각한다. 곧 진리란 자기 자신의 밖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우주의 근본 진리 <브라흐만>을 잡으려고 찾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우주의 일부이다. 우주에 근본 진리가 있다면 <나>도 우주의 일부이니까 <나>안에도 우주의 근본 진리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 먼 곳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안에 진리가 있다. 이것이 기독교나 플라톤과 다른 점이다.

이 <나> 안의 진리를 <아트만>이라고 한다. 한역하면 <아(我)>이다. 나 안에 <아트만(我))이 있어서 그것이 <브라흐만(梵)>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우파니샤드 철학은 가르친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한다. 이 사상은 불교에도 이어진다.

누구나 자신 안에 <아트만(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간단히 자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질이나 욕망에 의하여 마음이 흐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흐리게 하는 구름을 털어버리고 자신 안에 있는 <아트만>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나와 같은 하나인 것을 알게 된다. 범(梵)과 아(我)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 곧 일체가 된다는 것은 나와 우주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되면 나(我)는 사라지는 것이다.

<나>가 없어진다는 것은 <업(業)>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우주와 일체가 되므로 나의 행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곧 <업(業)>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업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윤회전생의 원인은 업(業)이니까 그 업이 사라지면 거기에는 윤회할 것이 없어진다. 이것이 해탈(解脫)이다.

이런 우파니샤드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많은 수행자들이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기원전 500년을 전후하여 수백 년 사이에 생겨나서 인도 세계에 퍼졌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든지 윤회전생(輪回轉生), 업(業), 해탈(解脫) 등의 생각은 인도인의 상식이 되어있다.

 

2) 자이나교의 출현

 

<우파니샤드> 철학을 토대로 한 신종교가 기원전 5세기경에 등장했다. 여러 종파가 나타났으나 후세까지 영향을 끼친 종교는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이 시기에 신사상이나 신종교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농업의 발전에 따라 특히 갠지스강 유역에 몇 개의 강국이 성장하였다. 지배자인 왕이나 군인은 크샤트리아 신분이다. 또 교역이 활발해지므로 상업을 맡았던 상인은 바이샤 신분으로 이들 중에는 왕후귀족에 떨어지지 않은 경제력을 가진 자가 나타났다.

크샤트리아나 바이샤가 힘을 써도 바라몬이 신분상으로 높고 위력을 발휘했다. 바라몬은 경제력이나 무력은 없지만 승려이므로 의식을 방패로 하여 위세를 떨쳤다. 아무리 해도 크샤트리아나 바이샤는 신분상으로는 바라몬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하여 크샤트리아나 바이샤는 바라몬을 부정하고 카스트제도를 파괴하여 줄 수 있는 종교 사상을 바라고 있었다.

 

 

자이나교의 상징 문장

 

 

숲속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서 그 중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이 두 종교의 공통점은 개조가 크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바라몬의 권위를 비판하고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것이다.

 

자이나교의 개조는 <발다마나(Vardhamana, 기원전 563년~기원전 477년)>이다. 존칭은 마하비라(Mahavira=위대한 영웅이라는 뜻)라 한다. 그는 윤회의 원인인 업(業)을 신체에 붙은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고행을 함으로써 전세에 만들어진 업을 지우고 새로 업이 달라붙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기 위하여 고행과 불살생을 주장한다.

 

불살생(不殺生)이란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회전생을 믿기 때문에 죽으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모기가 팔에 달라붙어서 피를 빨고 있다면 그 모기를 죽이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윤회전생을 믿는다면 이렇게는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기는 전생에 자신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 사상도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만일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는다면 그 소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할머니의 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채식을 주장하게 되었다.

자이나교에서는 절대로 산목숨을 죽이지 않으려고 한다. 숨을 쉴 때에 흡입되어 죽는 미세한 곤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입에는 마스크를 해야 하고 걸을 때에는 발에 짓밟혀 죽는 곤충이 있을 수 있으니 비를 들고 다니며 땅을 쓸고서 걸어 다닌다. 되도록 걸으려 하지 않으므로 승려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 신자가 보시할 것을 기다린다.

 

무소유를 주장하여 초기 자이나교에서는 맨몸으로 살았다. 옷 한 가지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고행하는 방법은 단식이다.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서 단식하고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자이나교 신자는 현재에도 있는데 대체로 상인 구릅이 많다. 농업을 한다면 흙속에 있는 생물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 이를 피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부자가 많다고 한다.

 

 

3) 불교의 출현

 

불교의 개조는 가우다마 싣달타(기원전563~기원전483)이다. 존칭은 불타, 생몰연대는 불확실하다. 인도인은 역사기록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생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니까 연대를 기록해 보아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불타(佛陀)란 <깨달음을 연 자>라는 의미이다. 가우다마 싣달타 이전에도 불타가 된 사람이 있다고 전해진다.

석가(釋迦)라고 하는데 석가란 가우다마가 속한 부족의 이름이다. 가우다마는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결혼도 하여 아이도 낳고 무엇 하나 부자유 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였는데 인생무상을 느끼고 나라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길에 들었다.

 

숲속에 들어가면 비슷한 수행자가 많이 있어서 가우다마는 친구를 만나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요가도 하고 단식도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과격한 고행을 해도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우다마는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을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저 사람은 수행이 괴로워서 도망친 것이라고 했다.

마을에 돌아와서 강가에서 쉬고 있을 때이다. 수행을 그만두고 온 처지라서 몸이 쇠약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마을 아가씨가 <스님 어서 드세요.>하고 우유를 주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수자타이다.

 

불교에서나 자이나교에서나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할 수 있는 사람은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뿐이다. 재가하여 수행하는 자에게는 결코 해탈은 불가능하다. 재가신자가 구원을 받는 불교가 출현하는 것은 그 후이다.

재가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수행하고 있는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해탈을 하지 못하더라도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좋은 업을 쌓을 수가 있는 것이다. 좋은 업을 쌓으면 다음 태어날 때에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자타(범어, 파리어 : Sujāhtā)에게서 우유를 받아 마시고 힘을 얻은 가우마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그때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가우다마는 생각하였다. 이 깨달음은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말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오해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생각을 바꾸었다. 깨달음에 가까이 가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가르침으로써 그런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될는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포교하기로 결심하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고행할 때의 친구이다. 가우다마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고행에서 탈락한 놈이다. 그러니 상대하지 말자.>하고 미리 약속하였으나 가까이 다가온 가우다마의 얼굴을 보고 <이 녀석은 달라졌네.>하고 생각하였다. 다시 가우다마의 설법을 듣고 그의 깨달음을 확신하고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은 가우다마가 깨달음을 이루고자 고행하실 때 함께 고행하던 다섯 분들로 아낙 교진여(阿若・憍陳如/Ajña-Kaundinya), 아설시(阿説示/Assaji), 마하마남(摩訶摩男/범어:Mahaa-naaman), 파제리가(婆提梨迦 범어:Bhadrika,Bhadraka; 파리어:Bhaddiya), 파부(婆敷/범어 : Vāspa) 등 다섯 비구들이다.

 

그의 주장의 중심은 4체설(四諦說)과 팔정도(八正道)이다.

사체설은 철학이다. 사체란 4개의 진리라는 뜻으로 고체(苦諦), 집체(集諦), 멸체(滅諦), 도체(道諦)라 한다.

고체란 인생의 생로병사의 네 가지의 괴로움(四苦)을 비롯하여 그 연속이라는 진리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에게 고가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무상한 것에 집착하여 번뇌(욕망, 애집)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번뇌 중에서 근본적인 것이 貪(貪慾), 瞋(분노함), 痴(무지)이다.(집체/集諦).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고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번뇌를 버리면 된다(滅諦). 그리고 우리들 범인이라도 번뇌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은 팔정도(八正道)(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의 여덟 가지의 바른 생활법)의 실천을 설법하였다.(道諦).

그는 팔정도를 실천하면 누구나 깨달음의 경지(해탈, 인생의 고를 초월하는 것)에 달할 수가 있다. 깨달음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다고 하여 카스트제도를 부정했다. 이런 때문에 크샤트리야나 바이샤가 많이 신봉하였다. 특히 크샤트리야의 지지를 받았다. 그 후에 마가다국의 보호를 받아서 인도 전 지역으로 그리고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널리 전파되어 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에도 3대종교로서 많은 사람이 신앙한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왕후 귀족, 크샤트리야, 바이샤의 보호 아래 발전하였다.

인도에서는 현재 자이나교의 신도는 있지만 불교 신도는 거의 없다.

13세기 초 불교교단의 근거지였던 비구라마시라사원이라는 것이 이슬람세력에 파괴되어서 인도의 불교는 사라졌다. 중도(中道)의 생각은 인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현재 인도불교도는 안베드카르에게서 시작된다. 안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을 계속해서 결국 카스트제도가 있는 한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인도의 사상을 조사하여 결국 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카스트제도가 없는 인도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불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개종한 것은 불가촉천민뿐이었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넓혀지지 않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