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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인더스문명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 19. 04:54

 

인더스문명 이야기

 

 

 

 

 

1, 인더스문명이란

 

인도에 처음 생겨난 문명이 고대 인더스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이다.

기원전 2500년~1800년경까지 인도의 서쪽에 흐르는 인더스강 중류에서 하류의 하라파 (Harappa)와 모헨조다로(Mohenjodaro=죽은 자의 언덕)를 중심으로 번영한 도시문명이다. 당시 인더스강 하류에는 약 60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모헨조다로(Mohenjodaro)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1800년 사이에 번영했던 고대 인더스문명 최대의 고대도시 유적이다. 1922년에 인더스강 하류에서 커다란 불탑의 일부가 대지에 솟아있는 것이 인도인 라칼다스 (Rakhaldas Bandyopadhyay)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것은 2세기 전후의 대사원의 일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1930년대에 이르러 영국인 고고학자 존 마샬(John Marshall)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발굴해 들어감에 따라 그 유적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거대한 고대도시의 유적임이 판명되고, 십 수 년 간 발굴을 계속하자 이 고대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견고한 성벽, 정연한 우물정자형의 가로, 완비된 배수시설, 곡물창고, 넓은 목욕장 등등. 이것은 몇 천 년 전에 치밀한 도시계획 하에 건설된 주위 5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 도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청동기, 채문토기, 인장 등도 출토되었다. 이 인장이나 점토판에는 문자가 새겨져있다. 소위 인더스문자(약 400종류가 있다고 한다)라 하는 이 문자는 아직 독해하지 못하고 있다.

고대 인더스문명에는 서아시아, 특히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미 인도와 서아시아 사이에는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고대도시에는 약 3만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 절정기는 기원전 2500년경이라고 추정된다. 다시 이 유적은 그때 이미 발견된 하라파(Harappa) 유적과 모든 면에서 유사했다.

<하라파>유적은 인더스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과는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 중간 지점에는 소규모의 유적이 차례차례로 발견되어서 이 두 개의 고대도시는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이 그 후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우리들은 이것을 고대 인더스문명이라고 한다.

 

2, 인더스문명의특징

 

주로 모헨조다로의 유적을 통하여 인더스문명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먼저 이들 도시는 모두 도시계획이 있어서 건설된 것이 특징이다. 곧 하수도가 완비되어있다든지 주택마다 쓰레기 투기구가 있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고대 도시국가란 도시 중심에 신전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인더스문명에서는 신전이 없다. 도시의 중심에는 커다란 공중목욕탕이 있다. 그런데 이 목욕탕이 신전 구실을 한 듯하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곳인 것이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사람들은 도시의 가운데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목욕재계)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된다. 이런 풍습은 지금의 인도에도 남아 있어서 갠지스(Ganges)강 강변에 베나레스(Benares=현지어로서는 바라나시)라는 성지가 있는데 인도 사람들은 여기서 갠지스 강에 들어가서 목욕을 한다. 곧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니고 목욕재계하는 것이다.

 

                                    모헨조다로의 골목                   목욕탕                                    하수도

 

상하수도가 발달한 것은 위생관념에서라기 보다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 있어서이다.

인더스문명은 청동기문명이다. 관개농경과 목축이 주 생산수단이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문명과의 교류가 있었다.

문자는 인더스문자가 있으나 아직도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인더스문명에서는 인장이 나오는데 이 인장은 소라든지 사슴이라든지 하는 동물 모양을 한 문자가 있다. 이것이 인더스 문자이다. 인더스문명에서 소가 그려져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지금도 소를 신성시하고 있다.

이 뛰어난 문명의 담당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는 남인도에 분포하는 인도의 선주민의 하나인 드라비다인(Dravidian)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인더스문명이 갑자기 멸망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더스강의 범람에 의하여 멸망했다는 설, 인더스강의 유로가 바꾸어진 때문에 멸망했다는 설, 기후의 건조화로 멸망했다는 설, 그리고 아리아인의 파괴에 의하여 멸망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다.

1800년경부터 급속히 쇠퇴하여 멸망하였다. 그래서 그 문명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인도문화에 계승되지 않았다.

 

3, 아리아인의 침입

 

인더스 문명이 멸망할 무렵이거나 아니면 멸망한 직후에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인도 유럽어족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그 후 서쪽으로 향하여 나간 부류가 이란 고원에 정착하여 페르시아인이 되고 동쪽으로 나간 부류가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은 인도의 선주민이다.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혼혈이 되면서 인도에 정착했다. 드라비다인이란 오스트라리아 선주민이나 뉴기니아 고지인처럼 피부가 검은 사람과 같은 계통의 민족이다.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사람들은 드라비다인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아리아인들은 아직 국가를 건설할만한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자그만 집단으로 인도의 밀림을 개척하면서 마을을 만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아리아인은 겨우 갠지스 강 유역까지 퍼져서 작은 국가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리아인을 포함하여 인도에는 여러 민족 계통이 있어서 매우 다양하다.

아리아인이 인도에 퍼져가는 사이에 현재까지의 인도를 결정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곧 종교라든지 신분제도 등이다.

 

4, 바라몬교와 신분제도의 발생

 

인도에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하게 된 아리아인은 태양, 하늘, 산, 강, 비, 우레 등의 자연과 자연현상을 신격화하여 이를 숭배하였다. 신들을 찬양하거나 의례를 정리한 것이 베다(Veda)이다.

가장 오랜 베다인 <리그베다(Rigveda)>는 신들을 찬양한 찬가를 모은 것으로 기원전 1200년~기원전1000년경에 만들어졌다. 다른 찬가의 선율을 서술한 <사마베다(Sāmaveda)>, 제식의 실무를 서술한 <야주르베다(yajurveda)>, 주술에 대하여 서술한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가 있다. 이 베다를 근본 성전으로 하여 바라몬이 제사를 집전한 바라몬교가 성립하여 그 사제인 바라몬이 세력을 강화하였다.

바라몬들은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매우 복잡한 의식을 구상해내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이 의식의 집행을 독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를 낼 수가 없다. 신들을 찬양하고 재액을 막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이들 바라몬 뿐이다. 이런 이유로 바라몬이라는 계급은 특권계급이 되었다. 동시에 바라몬 이외의 계급도 생겨났다.

최상급 신분이 바라몬(Brahma)이고 다음이 크샤트리아(kṣatriya) 곧 무인 신분이다. 그 다음이 바이샤(vaishya)라 불리는 일반서민이고 가장 낮은 계급이 슈드라(Shudra) 로 이것은 피정복민족이다. 이 신분을 바르나(varna)라 한다. 종성(種姓)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이 네 개의 바르나에 속하지 않은 최하층 신분으로 불가촉천민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사성(四姓) 밖에 있는 신분이다. 신분마저 없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으로 취급당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불가촉민 또는 불가촉천민이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러워져 있으니까 접촉하면 더러움이 전염된다는 때문이다. 그러면 더러움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라몬이라는 셈이다.

이 바르나는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단지 바라몬의 사람들이 현재에도 승려 일을 한다든지 크샤트리아 사람이 군인이라든지 하지는 않다. 농민인 바라몬도 있고 상인인 슈트라도 있다. 이 바르나(종성)을 4개로 나누면 너무 크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세분화하여 왔는데 이 세분화는 직업과 혈연에 따라 나누어져서 이 세분화된 것을 자티(Jāti=출신)라 한다. 소위 카스트제도라는 것은 실은 이 자티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 마을의 자티 구성을 보면 바라몬에서 슈트라 하고 불가촉천민까지 5개의 계급이 있는데, 같은 슈드라지만 군비(Kunbi), 말리(Marley), 소나루(Sonaru), 스탈(Stahl), 나비(Navi) 라는 자티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 마을에 있다. 원래는 농민, 금세공업, 대목, 이발소 등이 그들의 직업 곧 물려받은 직업이다.

바르나나 자티나 한 마디로 말하면 카스트제도라 할 수 있는데 그 실체는 신분차별이다. 현재 인도에서는 헌법 상 신분차별을 금하고는 있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형편으로 사회발전의 암이라 할 수 있다.

 

5, 신분제도의 현재의 양상

 

그러면 실제로 어떤 상황인가 보기로 하자.

인도에서는 결혼하려면 신문에 광고를 내어야 한다. 자신의 프로필이라든지 희망하는 상대의 조건 등을 신문에 싣는다. 그 때 반드시 자신의 카스트를 넣는다. 그 이외의 카스트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만일 다른 카스트의 남녀가 연애하여 결혼을 한다면 쌍방에서는 물론 반대할 것이며 그 두 사람은 카스트에서 추방되어 불가촉천민이 된다. 그리고 그 자녀도 불가촉천민이 되는 것이다.

직업차별은 어떠한가.

식당의 예를 들면 대체로 식당을 경영하는 카스트는 바라몬이라 한다. 물론 요리사를 비롯하여 웨이터도 모두 바라몬 계급의 사람이라 한다. 남에게 서비스하는 직종이라고 해서 하층 계급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계급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층 계급 사람을 고용한다면 바이샤 이상의 신분인 사람은 오지 않는 것이다.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의 서비스를 받으면 자신의 신분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차별을 심히 받는 계층의 사람은 불가촉천민이다. 어느 사람이 인도인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였는데 도중에 불가촉천민 집단이 지나는 곳에 차가 달려들어서 한 사람을 쳐서 죽게 되었는데도 그 친구는 조금도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한다. 곧 불가촉천민은 죽임을 당하여도 호소할 길이 없는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헌법에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인도공화국 초대 법무장관인 안베드카르(1891~1956)라는 사람으로 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었다.

안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이지만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서 학교에 다녔는데 머리가 좋아서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불가촉천민 차별을 없애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법무장관이 되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학교에서 교사는 바라몬 출신이었는데 그의 노트를 보아주지 않고 그의 질문에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체육시간이 끝나서 목이 말라 물을 마셔야 하겠는데 당시에는 상수도가 없었으므로 긴 자루가 달린 물그릇으로 떠 마셔야 했다. 안베드카르에게는 물그릇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물을 마시게 하였는데 물을 떠서 입을 벌리게 하여 입으로 물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물그릇이 그의 몸에 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한다.

그런데 불가촉천민 인구는 인도 전 인구의 약 2할 정도라고 한다. 결코 소수의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시작은 기원전 1000년 정도가 된다. 이것은 바라몬교의 출발과 함께 한다. 신분제도의 최상급인 바라몬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라 하여 다른 신분의 사람을 위협하고 위세를 부린 것이다.

점점 도시국가가 성장하여 도시국가 간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왕이나 귀족인 크샤트리아, 상인인 바이샤가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바라본 아래에서 굽실거리기가 싫어진 것이었다. 점차 의식만을 집행하는 바라몬교에 대하여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고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새로운 종교가 출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