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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피라미드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 18. 11:00

 

피라미드 이야기

 

 

피라미드(Pyramid)란 말은 그리스어로 삼각형의 빵 피라미스(Pyramis)에서 유래 한다고 한다. 이집트를 비롯하여 중남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사각추상의 거대한 석조 건조물을 총칭한다. 여기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피라미드는 분묘였다

 

기자(Giza)의 제1피라미드는 이집트 제4왕조 구푸의 분묘이고 세계 최고 최대의 석조 건축물이다. 일변의 길이가 149미터 높이가 147미터 평균 2톤 반의 석재 230만개를 쌓아 올려서 만든 것으로 건설 당초에는 표면은 석회석으로 덮어있었다.

 

이 대토목공사는 헤로도토스(Herodotos.BC485~420)에 의하면 10만 명이 1년 중 3개월씩 일해서 20년이 걸렸다고 전한다. 현대의 토목공학에서도 이 계산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갑자기 만든 것은 아니고 그 원형은 제1왕조(기원전2900년)의 마스타바(mastaba=석조분묘)에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차차 거대한 것으로 변하여 제3왕조의 제세르(기원전2750년)는 6층의 마스타바를 쌓아 올려 유명한 삭카라(sacchara)의 계단 피라미드를 건조하였다.

제4왕조 초대의 스네후르(기원전 2700년)는 그 계단을 매워서 소위 굴절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그 아들 구프의 피라미드가 제1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는 독립한 것이 아니고 그 주변 건조물과 함께 피라미드 컴프렉스라고 할 만한 것을 형성하였다. 그 주위에 왕비, 왕자의 작은 피라미드, 궁정 귀족의 석조 마스타바가 만들어져서 피라미드의 동쪽에는 제전(祭殿)이 있고, 이것은 터널로 나일강 하반의 신전으로 연결했다. 이 터널은 피라미드를 건조할 때 제방 둑 자리에 만들어졌다.

이 시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피라미드를 연구하면 당시 이집트 문명의 수준이 밝혀진다. 이 대건축을 완성하기 위하여 뛰어난 토목공학, 수학이 전제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일변이 정확하게 동 서 남 븍으로 면하고 있는 것은 발달한 천문학의 지식을 추측하게 하고 다시 그에 필요한 대노동력에다가 의료, 식량, 주거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각 부문으로 나누어 관리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경험을 가진 다수의 감독(관리)의 무리가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기록은 없지만 피라미드는 당시 고도한 문명의 대변자이다. 그 건설은 나일강의 범람기를 이용하였는데 이것은 나일강 동쪽에서 거대한 석재를 운반하는 편의에서 또 농한기가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되었다고 생각된다. 농민은 농한기에 이집트의 운명을 상징하는 신이신 왕을 위하여 아마도 기뻐하여 사업에 참가했을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기자의 대 피라미드 부근에서 피라미드 건조에 관계했던 사람들의 주거지로 보이는 유적이나 풍부한 생활 물자나 미라 등이 발견되어 전속 노동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전문 기술자와 전속 노동자가 현지에 살면서 연중 건설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종래 노예라거나 농민의 실업대책으로 노동했다는 것은 부정되고 있다.

그 후 가프라의 제2피라미드, 멘카우라의 제3피라미드가 건설 되었는데, 그것들은 차차 소규모로 변해간다. 기자에서 삭카라에 걸쳐서 동서 1마일 남북 4마일 반에 걸쳐 대소 무수의 피라미드나 마스타바가 산재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미완성인 채로 모래에 묻힌 것도 있다.

 

도굴을 막기 위하여

 

헤로도토스가 이집트의 사제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해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집트 왕 란프시니토스는 그 막대한 재보를 지키기 위하여 거대한 돌로 창고를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그 설계자는 비밀의 문을 만들어놓고 죽을 때에 두 아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왕은 봉인에 이상이 없는데 재보가 차차 줄어드는 것을 알고 덫을 놓았다. 형이 덫에 걸렸는데 신분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서 아우에게 목을 자르게 했다. 왕은 그 시체를 거리에 전시하고 수비군을 시켜 이것을 보고 슬퍼하는 자가 있으면 체포하라고 명했다. 아우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어 수비군에게 술을 먹여 시체를 훔쳐내었다. 다음에는 왕은 왕녀를 사창굴에 보내어 모든 손님으로부터 자신이 한 짓 중에서 가장 나쁜 짓과 교묘한 행위를 들어서 혹시 도둑질을 한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으면 체포하라고 명했다. 아우는 이 말을 듣고 새 시체의 한 팔를 감추어 놓고 왕녀에게로 가서 가장 나쁜 짓은 덫에 걸린 형의 목을 자른 것이고 더 교묘한 일은 수비군을 속여서 형의 시체를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녀는 서둘러 팔을 잡았는데 그것은 시체의 팔이고 아우는 도망치고 말았다. 왕은 이 범인의 교활한 지혜와 대담함에 질려서 포고를 내어서 그를 용서하고 막대한 상을 주고 왕녀와 결혼시켰다.>

왕은 모든 국민들 중에서 이집트인은 가장 현명하다. 그 현명한 이집트 사람 중에 이 남자는 더 현명하다고 하여 칭찬 했다 한다. 이것은 묘 도굴꾼에 대한 찬가가 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왕의 분묘를 건설한 설계자는 당시 이집트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기원전 2800년이라는 그 시대에 석기와 부드러운 구리 연장만으로 굳은돌을 잘라서 오늘 날 면도날도 끼이지 않을 정도로 쌓아 올린 그 재주는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피라미드가 건설된 장소는 단단한 암반을 골랐으므로 천만 톤의 무게를 견뎌서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 거대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그 상부에는 몇 개의 빈 방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역학의 원리에 딱 맞는다. 최후로 설계자가 고심한 것은 도굴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가지가지의 미로, 함정, 막힌 골목 터널, 가짜 문 등을 설치하여 왕의 관이나 재보가 수납된 후에는 그 통로는 커다란 돌 등으로 막아버렸다. 19세기의 고고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이런 고생 끝에 내부에 들어간 학자들에게 발견된 것은 언제나 수천 년 전부터의 도굴꾼의 저지른 발자취뿐이었다 한다. 제12왕조 이후의 여러 왕은 도굴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비밀 장소에 암굴분묘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것도 도굴꾼들은 결국 그 장소를 찾아내어 숨어들었다. 그 많은 분묘 중에 도굴을 면 한 분묘는 하나도 없었다.

 

미라는 어떻게 만들었나

 

이집트 사람은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육체를 보존함으로써 이것을 일시적인 가면 상태라 생각하고 혼이 환생할 때에 육체도 부활한다고 믿었다. 원래 건조한 이집트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미라가 되는 것을 보고 육체를 완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오늘 날 전하는 미라는 오랜 것은 중왕국 시대(BC2040~BC1800)의 것인데 그 기원은 더 올라간다.

헤로도토스는 3종류의 미라 제조 방법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가격에 대응한 것으로 가장 가격이 싼 것은 장을 빼내고 40일간 소금에 담가 둔 후 마포로 싼다. 더 고가의 것은 먼저 쇠 고리로 콧구멍으로 뇌를 빼내고, 다음은 옆구리를 절개하여 내장을 빼내고 이것을 각각 병에 넣는다. 그런 후에 시체를 술로 씻고 향료로 깨끗이 한 다음 뱃속에 약품, 향료를 채워서 꿰매고 약 70일간 소다수에 넣어서 미라로 한다. 다음 고급 마포로 감아서 다시 고무를 바른다. 고급인 것은 나무, 돌, 혹은 금속관에 넣는다. 값이 싼 것은 파피루스의 남은 조각을 붙여서 관을 만드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 날은 그 파피루스 문서의 자료가치로 매우 귀중한 것이 되었다. 미라가 다 이루어지면 승려들은 이것을 세워서 <개구(開口)>의 식을 행한다. 그럼으로써 미라에 혼이 들어가서 부활할 때까지 살아있을 수가 있다고 믿었다.

미라의 제조법은 매우 고도의 의학적, 화학적 지식을 전제로 한다. 특히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품이나 향료의 성질 또 그 필요한 양 등은 엄밀히 정해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