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정원과 바벨탑 이야기
유적의 발견
1899년 봄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웨이(Robert · Koldewey) 가 바그다드의 남쪽 80킬로에 있는 유프라테스강 가의 작은 언덕을 발굴 중에 어떤 도시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발굴 작업은 그로부터 10년 간 계속되었는데 유적의 전모가 나타나게 되자 그는 그 규모와 장려함에 놀라 낯빛을 잃어버렸다.
이 유적이야말로 그 최성기의 부와 권력의 스케일에 의하여 공전의 번영을 다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도시에도 그 추종을 불허할 영원한 도시 바빌론이었다.
이 고대 오리엔트의 최대의 도시는 네브가토네사르 대왕(재위 기원전 605년~기원전 562년) 시대에 그 최성기를 맞은 대왕은 함무라비 시대의 바빌로니아에 대개혁공사를 일으켜 광대한 성벽을 완성하고 시중에는 여러 가지의 대신전을 세우고 황금시대를 이룬 것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이다.
바빌론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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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바빌론은 실로 수백만의 인구를 헤아리는 세계 제1의 거대 도시였다. 수도를 둘러싼 성벽은 연65킬로미터에 이르고 있었다. 그 성벽은 높이가 90미터, 두께가 24미터이고 250개의 방어탑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었었다. 이 대 성벽의 꼭지에는 4두의 전차가 다릴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또 수도로 출입하는 입구로서 청동의 거대한 문이 100개나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의 문을 들어서면 24미터의 폭을 가진 도로가 이어지고 핑크색 대리석판이 깔린 도로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평행으로 펼쳐졌었다. 그 도로의 양가에는 사자상이 조각이 서 있었다.
대로의 끝에는 수도 바빌론의 현관을 지키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이 문은 여신 이슈타르에게 바친 것이다. 양측으로 대를 이룬 탑이 있고 전후 이단 부분으로 된 거대한 문이었다.
그 문은 구운 벽돌로 만들어지고 그 표면을 바위처럼 굳은 광택 벽돌로 싸여 용이나 황소의 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문은 의식 때에만 쓰인 것으로 이슈타르의 문이라고 한다.
이 대로에서 이슈타르문까지에 이르는 장소는 방어 요새로 되어있다. 여기서 이슈타르문을 향하여 달려오는 적이 있다면 가두어지고 주위에서는 화살이 날아오게 되어있었다.
이 이슈타르 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성벽을 겸해서 대왕궁이 나타난다. 이것이 공중정원이다.
장려한 정원 건설
네브카도네사르 2세 왕은 판도를 넓히고 수도 바빌론은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쌌는데 공중정원, 가공정원, 매달린 정원이라고 일컬어지는 공중정원은 먼저 평지에 흙을 쌓아 올려서 작은 산을 만들었다.
그 크기는 4방 400미터 높이가 15미터로 그 토대 위에 계단모양의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높이가 105미터 최상부의 넓이는 60평방미터 정도였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 앞에 기름진 흙을 운반하여 넣어서 여러 가지의 식물을 재배하였다. 바빌로니아는 매우 건조한 지역이라서 최대의 문제는 식물에 물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정원의 최상부에 거대한 물탱크를 설치하고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끌어올려서 탱크에 저장된 물을 위에서 아래로 파이프를 통하여 공급하였다.
그밖에도 날씨에 따라 인공적으로 물을 뿌려서 비를 내리게도 하였다 한다.
공중정원(상상도)
이 정원은 건물이기 때문에 내부에는 수많은 방이 있어서 실내는 식물에 공급하는 물로 인해서 언제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었으나 때로는 물이 새기도 하였다. 이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천장에는 갈대와 아스팔트를 깔고 그 위에 두꺼운 납판을 깔았다 한다.
테라스 내부에는 네브카도네사르왕 부처의 방이 있었다. 대왕과 왕비는 이 무지개 뜨는 풍부한 녹음 속에서 생활하고 새소리를 들으면서 나날을 즐겁게 보냈다.
왕비를 위한 정원
그런데 이 공중정원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인가?
이것은 왕이 혼자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고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왕비 한 사람을 위하여 조성한 것이었다.
네브카도네사르왕은 메디아의 공주 아미디스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바빌로니아와는 대조적으로 메디아는 녹음이 우거진 산 속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건조한 바빌로니아의 풍토에 익숙하지 못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불쌍히 여겨 왕비에게 메디아에도 없는 훌륭한 정원을 만들 결심을 하였다. 이렇게 왕비를 위하여 막대한 국고와 노동력을 써서 구축한 것이 이 공중공원이었다.
이 정원은 멀리서 보면 바빌론 중심에 아름답게 떠 있는 정원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바벨탑 전설의 원형
멀리 보이는 바벨탑(상상도)
이 정원에서는 멀리 바벨탑도 보였다.
바벨탑은 바빌론의 에테메난키(Etemenanki,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라 부르는 지구라트를 지칭한 것이라 생각된다. 지크라트란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인공으로 쌓아 올린 성탑을 말한다. 그 위에는 신전이 있었다.
지크라트는 파라미드형과 나선형인 것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까지 20개소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바벨탑은 함무라비 시대에 지어져서 수 백 년에 걸쳐 몇 차례 수복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것이야말로 웅대한 건축물로서 고대 세계 건축물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탑의 크기를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여러 고증을 통해서 보면, 1층이 길이 90m ·너비 90m ·높이 33m, 2층은 길이 78m ·너비 78m ·높이 18m, 3층은 길이 60m ·너비 60m ·높이 6m, 4층은 길이 51m ·너비 51m ·높이 6m, 5층은 길이 42m ·너비 42m ·높이 6m, 6층은 길이 33m ·너비 33m ·높이 6m이고, 7층이 길이 24m ·너비 24m ·높이 15m로 알려져 있다. 총 7계단, 높이 90m였으나 현재는 기초만 남아 있다. 그 밑에는 정원이 6만 평방미터나 되어서 신관들의 훌륭한 주거나 창고 등이 서 있었다.
구약성서 창세기(11장 1-9절)에서는 바벨탑은 인간의 허영심의 축소판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그에는 <탑을 한 층 더 높이 해서 하늘과 경쟁하자.> 하고 대왕이 명령함에 여호와 신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도전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탑을 건설하고 있던 석공들에게 언어의 혼란을 일으켜 결국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어서 탑을 쌓는 일을 단념하였다고 한다.
바벨이란 <혼란>을 의미하는 말로서 후에 그리스어로서는 바빌론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대를 바빌로니아라 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는 네브카도네사르 대왕에게 침공당한 유태인이 포로가 되어서 수도 바빌로니아에 끌려 간 사람들의 견문이 다수 반영된 것일 것이다.
기원전 586년 두 번째의 침공에 의하여 바빌론의 포로가 된 많은 유태인 노예가 고국의 멸망 사실이 전설이 되어서 전해 온 것일 것이다. 당시 바빌론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중정원도 바벨탑도 볼 수가 없고 폐허가 되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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