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이클 파라데이 이야기.(4/4)
=전자유도의 법칙을 발견. 풍부한 전기세대의 막을 열다.=
4) 왕립연구소와 연구 이외의 업적
1824년에는 왕립협회회원으로 선발되고 1825년에는 데이비의 뒤를 이어서 영국왕립실험소장이 되었다.
1833년 파라데이는 존 풀러(John Fuller、1757-1834, 영국의 정치가, 자선가) ,마드 자크 풀러("Mad Jack" Fuller)의 추천으로 왕립연구소의 초대 풀러교수직에 취임했다.
이것은 풀러의 후원에 의하여 창설된 화학의 교수직이고 명예직이라서 강의를 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왕립연구소에서의 화학이나 전자기학의 연구 이외로 파라데이는 민간 기업이나 영국 정부에서 의뢰를 받은 일에 시간을 내었다. 예를 들면 탄광에서의 폭발사고의 조사, 법정에서의 전문가 증인, 고품질의 광학유리의 성분검토 등이다. 1846년 하우우[pf의 탄광에서 95명이 사망한 폭발사고를 조사하여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st Baronet、1797-1875, 스코트란드 출신 지질학자, 법률가)과 함께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는 과학적으로 착실해서 탄광의 분진이 폭발의 위력을 증가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탄진폭발에 대한 대책은 1913년에 다른 탄광에서 대사고가 발생하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로서 파라데이는 등대의 건설이나 운용, 선저의 부식을 방지하는 프로젝트 등에도 시간을 내었다.
파라데이는 지금으로서는 환경학이라 불리는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스완지(Swansea)에서의 공장에 의한 오염을 조사하고 조폐소에서의 대기오염에 대해서도 조언하곤 하였다. 1855년 7월 타임지에 테임스강의 오염 문제로 편지를 보내고 펀치지(Punch/영국 풍자지)에 풍자화가 게재되게 되었다.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는 계획 입안과 평가에 참가하였다. 또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에서의 수집품 청소나 보호에 대해서도 조언하고 1857년에는 동 캐러리 운영의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교육에도 관여하고 있다. 1854년 왕립연구소에서
교육에 관하여 강연하고 1862년에는 영국의 교육정책에 대해서의 지론을 전하기 위하여 공립학교위원회에 출석하였다. 또 당시 일반대중 사이에 유행했던 점술(占術)이나 최면술이나 강령회(降靈會)에는 부정적인 입장으로 참가하고 있고 교육에 관하여 정부에 대해서도 대중에 대해서도 엄했었다.
파라데이는 일반인을 향한 강연도 많이 했다. 세계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모은 금요강연(1825년부터 개시), 소년소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렉쳐(Christmas Lectures/어린이를 위한 과학 강연), 유명한 촛불의 과학 등이 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많다. 파라데이는 1827년부터 1960년까지 19회의 크리스마스 렉쳐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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