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이야기(4/5)
--고교시절에 최소이승법을 발견한 근대수학의 시조--
5, 인품과 사생활
가우스는 신앙심이 깊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군주제를 지지했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나폴레옹과 대립했다. 그는 다른 수학자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엄숙한 사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언어에 뛰어나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 신문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통계학적 지식도 있었기 때문에 투자에 성공하여 안정된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사생활에서는 1805년에 요한나 오스트호프(Johanna Osthoff, 1780-1809)와 결혼했다. 그는 요한나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애지중지하였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지만, 요한나는 1809년에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이어서 차남 루이스도 요절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의 정신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루이스의 사망 직후, 프리데리카 빌헬미네 발트에크(Friederica Wilhelmine Waldeck, 애칭 미나: Minna)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에서 얻은 행복은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우스는 요한나의 흔적을 잊지 못했고, 재혼 상대인 미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했다. 미나 역시 1831년에 오랜 병 끝에 사망하였고, 그 후에는 딸 테레제(Therese)가 그의 곁에서 돌보았다. 또한, 가우스는 어머니와 함께 1817년부터 그녀가 사망한 1839년까지 함께 살았다.
아이들은 두 명의 아내에게 각각 세 명씩, 총 여섯 명을 두었다. 요한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요제프(Joseph, 1806년 - 1873년), 빌헬미나(Wilhelmina, 애칭은 미나, 1808년 - 1846년), 루이(Louis, 1809년 - 1810년)이다. 특히 빌헬미나는 가우스와 비슷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녀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나 발트에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오이겐(Eugene, 1811년 - 1896년), 빌헬름(Wilhelm, 1813년 - 1879년), 테레제(Therese, 1816년 - 1864년)이다. 오이겐은 1832년경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찰스에 이주하였다. 이후 빌헬름도 미주리주로 건너가 농업을 시작했으며, 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신발 사업에 성공하였다. 테레제는 결혼한 후에도 가우스를 돌보며 집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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