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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14, 라이트 형제 이야기(6/6)

간천(澗泉) naganchun 2024. 9. 9. 02:54

14, 라이트 형제 이야기(6/6)

=비행기를 발명하여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시켰다.=

 

6, 비행 성공 후의 고뇌와 분투

 

1) 라이트 형제의 영광과 갈등

 

라이트 형제는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를 이용한 비행의 실용 기술 개발자>로 법원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드시 영광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공과 비행 기술에 관한 특허는 비행기가 무기로 주목받으면서 다툼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라이트 형제를 노골적으로 적대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첫 번째 인물은 찰스 월컷(Charles Doolittle Walcott)으로, 그는 스미소니안협회의 회장에 취임한 후, 라이트 형제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비행기를 박물관에 전시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인물은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였다. 그는 항공 회사를 설립하여 라이트 형제와 특허 분쟁을 벌였으나, 법원에서는 계속 패소했다. 커티스는 월컷과 손을 잡고 1914년 랑그레이의 애어로드롬 재비행 실험을 성공시키며, 라이트 형제의 선구적 지위를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커티스가 35곳을 개조한 비행기였으며, 전혀 다른 기체였다.

 

2) 라이트 형제의 명성 하락과 퇴보

월컷은 스미소니안협회 연차보고에서 랑그레이가 처음으로 비행 가능한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성명을 내고 이를 워싱턴 박물관에 전시했다. 동생 오빌은 이에 항의했으나 협회는 무시했고 많은 사람들은 랑그레이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비행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라이트 형제가 특허를 보유한 기술은 진부화되었고, 예를 들어 그들의 날개 비틀림 방식은 보조익으로 대체되었다.

1908년 프랑스 란스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비행 대회에서는 앙리 파르망, 위베르 레섬, 루이 블레리오가 각각 비행 시간, 고도, 속도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커티스도 이 대회에 출전해 눈부신 성적을 기록했으나, 라이트 형제는 이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3) 라이트 형제의 기체 결함과 마지막 여정

라이트 형제의 기체는 다른 비행기들과 비교해 큰 결함이 있었다.

조종 응답성은 뛰어났으나 안전성이 낮았고, 이륙할 때 레일이 필요했으며 프로펠러가 체인 구동 방식으로 출력이 제한되었다.

1910 라이트 형제는 B형 비행기를 완성했으나 체인 구동 방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1911, 케일브레스 페리 로저(Calbraith Perry Rodgers, 1879-1912, 미국의 파일럿으로 라이트플라이야 EX형으로 최초로 미국대륙힝단 뉴욕에서 캐리포니아까지 비행을 했다)는 라이트 B형을 몰고 미국 대륙 횡단 비행에 도전했으나, 추락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기체의 대부분이 교체되었으며, 원래의 기체는 거의 남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윌버 라이트는 1912년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오빌은 4년 후 비행기 제조에서 은퇴했다.

 

4) 비행기의 복귀와 오빌의 후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라이트 형제의 공로는 재평가되었고, 라이트플라이어호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하지만 오빌 라이트는 자신의 발명이 전쟁에서의 파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후회하며, 만년에 비행기의 발명을 후회하는 발언을 남겼다.

 

5) 비행 사고

1908917일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군 육군기지인 포트 마이어스(Fort Myers에서 오빌이 조종하는 라이트플라이어호가 데모 플라이트 중에 추락했다. 동승하고 있던 토마스 세르프리치(Thomas Etholen Selfridge , 1882-1908) 육군중위가 사망하고 오빌도 중상을 입었다. 세르프리치는 비행기 사고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