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라이트 형제 이야기(4/6)
=비행기를 발명하여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시켰다.=
5, 라이트형제의 성공 요인과 그들의 협력
1, 라이트형제의 성공과 자문
라이트 형제는 다른 많은 사람이 실패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성공시켰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말 천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답이라 할 수 있어도 윌바는 그것을 부정하고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에게는 각각으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다른 요인이 수천 개나 합쳐있어서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발명의 재주보다도 10배 이상이나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시간이 되돌아와도 자신이 갔다 온 것을 다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기묘하게 짜인 덕분이고 다시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항공 분야의 역사가들은 그래도 성공의 이유를 찾으려 하여 왔다.
2, 윌바 라이트의 개인적 배경과 동기
라이트형제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윌바는 양친이 예일대학에로의 진학을 기대한 공부와 스포츠 양쪽에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아이스하키에서 크게 부상하여 우울병이 발생하고 집안에 박혀 살았다. 대학 진학도 단념하였다. 동생 오빌의 인쇄업을 돕고 세월이 흐르는 대로 인생을 맡겨서 보내고 있었는데 윌바는 인생의 큰 기회가 미래에 있을는지 모른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따라서 윌바의 심층의 생각에는 자신이 일반대중으로부터 빼어나기 위해서는 실용적 비행기의 추구에 내디뎠다. 이미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흥미와 투자를 이유로 비행기의 개발에 뛰어든 라이벌들에게는 없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감정을 윌바는 품고 있었다.
3, 라이트형제의 기술적 상호 보완
기술자로서 보면 형 윌바와 동생 오빌은 전혀 다른 타입의 기술자였다. 형 월바는 비행기 전체를 보고 균형, 역학적 동작, 안정성을 생각해서 그리고, 비행기를 시스템으로서 생각하는 데에 능한 기술자였다. 한편 동생 오빌은 드라이버나 펜치를 잡기를 갈망하여 기계 요소를 세세한 세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데에 능한 기술자였다.
라이트형제도 자신들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이 형제가 성공한 비결의 하나였다. 두 사람 어느쪽도 다른 쪽의 장점에 의지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충하고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4, 토론을 통한 짐리탐구
라이트 형제는 서로 의론하는 데에 크게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윌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빌과 싸우는 것은 실로 좋다. 참으로 오빌은 싸움을 좋아하는 남자이다.> 오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론이 길어지면 바보스럽게 서로의 주장이 거꾸로 되어서 실은 의론이 시작된 시기부터 의견의 일치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보고 있던 라이트자전거점의 기계공(차리 타이러/Charlie Taylor)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자 모두 감정적이었다. 서로 큰 소리를 지르면서 험한 소리를 하였다. 참으로 화를 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뜨거워진 것은 확실하다.>
라이트형제는 격하게 말하면서 진실의 핵심부가 떠오를 때까지 일종의 구두 속기처럼 재빨리 아이디어를 맞추어갔다.
5, 비핼기 개발 초기 성공과 과학적 접근
라이트형제는 비행기 개발을 시작한 최초기에 곧 최초의 1899년 연(凧)의 단계에서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취미로 하고 있던 경험에서 방그선회(소반경선회)의 필요성을 깨닫고 롤운동의 수단으로서 뒤틀림날개(warping wing)를 고안하였다. 그 결과 제1차세계대전기의 주력 구성이었던 단형익의 복엽기 구성을 채용하고 있어서 실로 뒤틀림 날개를 뒤틀리는 구조로서 구형익(矩形翼)의 복엽기 구성이 거의 필수였기 때문에 다른 익형상(박쥐 같은 날개)이나 다른 익구성(곤충같은 날개)를 시도하는 등 하여 기술적으로 곤란해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까지의 많은 연구자의 비행에 대한 도전이 때마다 실패를 거듭해 온 데 대하여 라이트형제는 당시로서는 극히 고도의 과학적 시점에서 비행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또 동시에 기술적 공학적으로 착실한 수법을 취하였다. 풍동실험에 의하여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몇 개인지 글라이더 시작기를 작성하고 일보일보 견실하게 비행기를 개량했다. 연구의 초기에는 당시의 비행기 개발의 최첨단을 가고 있던 사뮤엘 랑그레(Samuel Langley、1834-1906, 미국 천문학자, 발명가로 항공의 선구자) 교수가 소속하는 스미소니안협회에서 연구 자료의 제공을 받고 있었다.
글라이더에 의한 실험회수도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 독일 초기 항공공학 발전에 공헌한 항공 파이어니어)에 비하면 훨씬 상회하고 많은 실험 데이터를 수집함과 동시에 비행 기술을 체득할 수 있었다. 글라이더를 기초로 먼저 조종을 연구하여 스스로 파일럿이 되어서 동력을 추가하는 것이 그 들의 전략이고 타자의 프로젝트는 동력기체의 제작밖에 안중에 없었다고 본인들이 말하고 있다.
6, 랑그레이교수와의 비교와 실험적 우위
형제의 성공에 앞서서 1903년 10월 7일과 12월 8일의 2번, 형제도 가르침을 청했던 사무엘 랑글레이(Samuel Langley、1834-1906, 미국 천문학자, 발명가로 항공의 선구자)교수의 비행기 에아로도롬(Aerodrome, 1898년 5만 달러로 미육군의 의뢰로 사무엘 랑글레이 교수가 개발한 실험적 항공기)은 비행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어느 쪽도 날지 못하고 전락하였다. 스미소니안협회회장의 지위에 있고 미국 정부 원조로 주도한 실험의 실패는 랑그레이의 만년의 평가를 땅에 떨어뜨렸다. 랑그레이교수의 프로젝트는 먼저 무인 동력비행기로 실험을 하고 다음에 유인 동력비행기를 비행시킨다는 것이고 파일럿으로서는 무턱대고 강요당하는 것이 되었다.
7 성공을 위한 철저한 준비와 자금
비행 기록으로 하면 오빌 쪽이 조종에 능한 것 같다. 형제는 실험회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안전한 강풍이 부는 장소>를 기상대에 물어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키티호크(Kitty Hawk)를 그 장소로 선택했다. 안정된 강풍이 필요한 것은 글라이더를 연(凧)처럼 줄로 공중에 고정시켜 안전하고 안정하게 실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리리엔탈은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도 좋도록 인공으로 언덕을 만들었다. 또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
또 형제는 자전거점을 경영하는 데서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자변할 수 있었고 자전거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예를 들면 2기의 프로펠러는 체인구동이고 회전의 방향을 좌우를 거꾸로 하여 회전축을 지우는 체인을 한편으로 교차하게 하였다.
8, 조종 응답 우선의 비행기 설계
한편 그들의 기체는 기체의 전방에 수평안정판 겸 승강타가 있는 등 안전성 면에서 문제도 있고 실제 후년의 재현 프로젝트는 그 점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안전성과 조종응답은 양립하지 않기 때문에 라이트형제는 조종응답을 최우선한 비행기로 비행해서 참 비행기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한 정신론만이 아니라 형제는 활공 비행을 반복 조종하여 숙련시킴으로써 성공을 얻었다.
라이트형제는 격하게 말하면서 진실의 핵심부가 떠오를 때까지 일종의 구두 속기처럼 재빨리 아이디어를 맞추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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