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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

최영 장군과 목호난의 평정

간천(澗泉) naganchun 2011. 4. 13. 04:48

 

최영 장군과 목호난의 평정

 

 

 

Ⅰ. 머리말

 

고려는 고종 18년(1231)에 몽고(원)의 침략으로 개경의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이에 대항했다. 그러나 고종 46년(1259) 강화(講和)를 맺어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28년간에 7차에 걸쳐 침략 당했으며, 원종 10년(1269) 개경 환도 이후 100여 년 간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영토의 일부는 점령당하고, 왕실과 조정은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대몽 항전의 결의를 다진 삼별초가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쫓기어 현재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패함으로써 탐라(제주도)는 고려 원종 14년(1273)부터 공민왕 23년(1374)까지 102년 간 몽고(원)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몽고(원)는 탐라(제주도)에 탐라총관부(眈羅摠菅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몽고의 관리를 파견하고, 몽고말을 입식시켜 목마장으로 관리하고, 병선을 제조하게 하는 등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이며 식민지로 경영하였다.

목호(牧胡)란 몽고(원)가 목마장 경영을 위하여 파견한 목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100여 년 간 원 나라의 비호 아래 탐라민을 괴롭히고, 고려 관원을 살해하며, 고려 조정의 결정에 반대하며, 공마(貢馬)를 거부하는 등 빈번히 난리를 일으켰다.

몽고(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중원에서 명(明) 나라가 건국하여 원의 세력을 북으로 몰아내게 되는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에 이르러, 목호들은 공마를 거부함으로써 고려와 신생 명나라와의 국교 수립에 암으로 작용하게 되자, 고려 조정은 최 영 장군을 삼도도통사로 임명하여 탐라(제주도)에서 횡포를 자행하여 무정부 상태를 조성한 목호를 토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최 영 장군은 일찍이 충숙왕 3년(1316)에 태어나서, 창왕(昌王) 원년(1388) 서거하기까지 개경 근처 오예포[五乂浦=현 장연(長淵)]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고, 랴오뚱(遼東) 정벌을 꾀하며, 개경까지 침입하려는 홍건적을 물리치기도 한 명장이다. 특히 탐라(제주도)에서는 목호의 난을 평정하여 몽고(원)의 남은 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탐라(제주도)에 평화를 회복하고, 고려의 자주 국권이 전 영토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여기에 최 영 장군의 업적 자료를 정리하여 게재함으로써 장군의 위업을 기리며, 그 정신을 되살려, 자주 국권의 수호와 민족 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국민정신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자료가 되게 하고자 한다.

 

 

Ⅱ. 고려와 몽고(원)와의 관계

 

1. 몽고(원)의 건국과 고려와의 관계

1206년 몽고 고원에서 테무진(鐵木眞)이 몽고 민족을 통일하여 징기스칸이라 칭하고 원 나라를 건국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징기스칸이 1227년에 죽고 그 3자 오고다이(太宗)가 즉위하여 남방 대정복을 시작하였다.

북아시아 초원 지대의 유목 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 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송(宋), 금(金)과 함께 고려(高麗)도 몽고 침략 대상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을 치고, 남송과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기지를 구하려는 목적도 몽고가 고려에 침략의 손을 뻗친 하나의 이유였다. 몽고가 금을 공격하자 금이 망할 무렵에 독립한 거란이 몽고에 쫓기어 고려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므로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이후로 몽고는 거란을 고려 영토에서 격퇴시켜 준 은인으로 자처하고 고려에 조공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점차 그 요구가 무리해져서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졌었다. 이 무렵 몽고의 사신 저고여(箸古與)가 고려로부터 귀국 도중 살해된 일을 구실로 하여, 고종 18년(1231)에 제1차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강화를 요구하고 일단 몽고군은 철수하였으나, 무인 정권인 최 우(崔瑀)는 항몽을 결심하고, 고종 19년(1232)에 서울을 강화도로 옮겼다. 이후 30년간에 7차의 침입을 당하였다.

 

1) 몽고의 침입

제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몽고 사신 저고여가 귀국 중 살해당한 것을 빙자하여 원장 살례탑(撒禮塔)이 처 들어왔으나, 고려 장수 박 서(朴犀)가 저항을 하였고 고려 조정이 항복 강화에 의하여 철군했다. 제2차 침입은 고종 19년(1232)에 고려가 강화도에 천도함에 분노하여 침략하여 2년 간 주둔했는데 이 때 부인사(符仁寺) 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다음 제3차는 고종 21년(1234)에, 제4차는 고종 34년(1247)에, 제5차는 고종 42년(1254)에, 제6차는 고종 43년(1255)에, 제7차는 45년(1257)에 침입하여 고려 태자를 인질로 원에 파견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2) 몽고의 침입이 끼친 영향

 

(1) 피침과 강화도 천도

고종 18년(1231)부터 30년 동안 7차례의 침입을 받아 국토는 유린당하고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는데 1232년에는 대장경이 소실되었고, 1238년에는 황룡사가 소실되었다.

고종 19년(1232)에 고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 강도(江都)라 하게 되고 유격전으로 항전하다가 원종 10년(1269)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2) 개경 환도와 왕실의 격하

고종 46년(1259)태자 전(典)의 제안에 따라 강화 조건을 수락하고 원군을 철수시키고, 원종(元宗) 10년(1269)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로 고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원 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 하는 부마국(駙馬國)이 되었고, 왕실은 격하되어 세자는 의무적으로 북경에 인질(禿魯花=人質)로 파견되어야 하고, 왕은 ‘조(祖)․종(宗)’의 묘호(廟號) 대신에 ‘왕(王)’자를 사용하였고, 원에 대한 충성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머리에는 반드시 충성 충(忠)자를 써야 했다. 원종의 세자 심(諶)은 원 세조의 공주를 왕비로 맞았고, 왕으로 즉위하고서는 충렬왕(忠烈王)이라 하였다.

 

(3) 원의 일본 원정 지원 수락

고려는 원의 일본 침략 지원 요구를 수락하여 침략 기지화되었다.

① 1천 척의 함선 건조 요구를 수락하고, 900척을 건조 헌납

전라도 변산(邊山), 천관산(天冠山)에 조선소를 설치하였고, 공장(工 匠), 역부(役夫) 3만 명을 동원하여 함선 900척을 건조하였다.

② 병력 동원 요구를 수락하고 1차 원정(1274)에 참전

원의 1차 일본 원정(1274) 시에 원은 병사 8천명, 키잡이와 사공 1만 5천을 요구하였으나, 그 요구 중 6천을 동원하여 참전시켰다.

③ 원의 2차 일본 원정(1279) 지원

원의 2차 일본 원정(1279)에 병선 900척을 건조하여 헌납하였고, 사공 1만 5천 명과 병사 1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그 동원 병력에 따른 식량도 공급하였다.

 

(4) 국토가 점령당함

몽고는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자비령 이북을 통치하기 위하여 동녕부(東寧府)를 두었으며,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眈羅摠菅府)를 두어 통치했다. 해마다 조공을 징수하였으며, 충렬왕 26년(1280)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Ⅲ. 삼별초(三別抄)의 항쟁과 원의 탐라 지배

 

 

1. 항파두리의 삼별초 패퇴와 탐라 점거 

원종 11년 몽고와의 강화와 개경 환도를 반대하여 삼별초가 배중손(裵仲孫) 지휘하에 저항하였으나, 고려의 개경 정부가 몽고와 결탁함에 근거를 진도로 옮겨 항전했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되고 중심인물을 많이 잃고 그 나머지 무리가 원종 12년(1271)에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점거하여 항쟁을 계속했다.

원종 14년(1273)에 고려 정부와 원이 여몽연합군을 편성하고 정벌에 나섰다. 여몽 연합군은 둔전군(屯田軍) 2천, 한군(漢軍-원의 한족 군대) 2천, 무위군 2천, 고려군 6천 도합 1만 2천으로 편성되었다.

여몽 연합군은 원종 14년(1273) 4월 9일에 출진하여 동년 4월 28일 삼별초의 저항군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삼별초의 토벌 결과 원은 탐라를 점령하게 되었다. 탐라(제주도)는 원종(元) 14년(1273)부터 공민왕(恭愍王) 23년(1374)까지 탐라총관부(眈羅摠菅府)라는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관리)를 파견하여 지배하였다.

 

2. 목마장 설치 및 공마 강요 

군마 징발을 위하여 충렬왕 2년(1276)에 몽고말 160필을 수산평(水山坪)(현 성산읍 수산리)에 입식시켜 기르게 했다. 그 후 충렬왕 3년(1277)에는 소, 낙타, 노새, 양 등을 입식시켰다. 차차 목마장으로서의 경영이 전도로 확산되고, 목마장을 경영하기 위하여 동서아막(東西阿幕)을 설치하였으니 동쪽에는 성산읍 수산리에 동아막(東阿幕)을 두고, 서쪽에는 한경면 고산리에 서아막(西阿幕)을 두었으며, 목장을 관리하는 관리로서 단사관(斷事官), 만호(萬戶), 목호(牧胡)를 파견하여 관리했다. 이때 탐라의 목장은 원의 14개 목장 중에서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였고, 이 목장을 통하여 공마 수만 필을 징구하였다.

 

3. 일본 정벌의 기지화 

원은 탐라를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 기지화하여 병선 수리소를 설치하고, 일본 정벌용 병선 100척을 건조하여 제공했으며, 병력과 군마를 제공했다.

 

4. 원의 죄인 유배지화 

충렬왕 원년(1275)에 원은 탐라에 도둑 100명, 죄인 77명을 유배시켰다.

 

Ⅳ. 목호 횡포의 배경

 

원은 탐라의 이용 가치를 고려하여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원의 죄인을 유배시켜 목호들의 활동을 비호하는 세력을 부식시키는가 하면 고려 조정은 파견된 원 관리를 우대함으로써 목호들로 하여금 오만한 자세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1. 통치 기구의 설치 및 관원 파견 

원은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탐라국초토사(眈羅國招討司)를 설치하고 군관을 배치하여 삼별초(三別抄) 평정 후의 처리에 당했다. 충렬왕 원년(1275)에는 탐라국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眈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菅府)를 설치하고 행정관을 배치하여 관리하였다. 충렬왕 10년(1285)에는 탐라국군민안무사(眈羅國軍民安撫司)를 설치하고 군관을 배치하여 관리하였다. 충렬왕 27년(1302)에는 탐라국군민만호부(眈羅國軍民萬戶府)를 고려 정부에 예속시켜 관리하였다.

원이 설치한 통치 기구에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안무사(安撫使), 부사(副使), 지사(知事), 첨사(僉事) 등을 파견하였다.

 

2. 군대의 파견 

고려 원종 14년(1274)에 원이 파견하는 초토사 실리백(失里伯)이 부임하면서 군대 200명을 인솔하여 부임했고, 이어서 군대 1,400명을 탐라에 주둔시켰다.

고려 충렬왕 8년(1283) 원과 고려군 1,400명을 증원 주둔시켰다. 고려 충렬왕 10년(1285)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가 진수군을 인솔 부임했다.

 

3. 목호 비호 세력 부식 

고려 충렬왕 원년(1274)에 원은 절도범 100명을 탐라에 유배시켰고, 충렬왕 3년(1276)에는 죄인 77명을 탐라에 유배시켰는데, 이들 유배자들 중에는 왕족, 대신, 승려 등도 포함되었었다.

 

4. 고려 조정의 탐라다루가치 우대 

고려는 탐라에 파견된 다루가치(관리)를 궁중에 초청하여 향응을 베풀기도 하였고, 신임 다루가치에게 왕이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기도 하였다.

 

Ⅴ. 목호의 횡포와 난

 

1. 반란과 고려 관원 살해

1) 제주도순문사(濟州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 등 관원 살해

공민왕 5년 (1356)에는 목호 가을적(加乙赤), 홀고탁(忽古托) 등이 기철의 역모에 목호가 연루된 사실을 구명한다 하여 파견된, 관원 순문사 윤시우, 목사 장천년(張天年), 판관 이양길(李陽吉) 등을 살해했다. 공민왕 11년(1362)에는 고독불화(古禿不花),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제주도의 원 예속을 요구하여 난을 일으켰다.

2) 전 탐라 만호(萬戶) 박도손(朴都孫) 살해

공민왕 11년 원이 파견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가 제주에 만호로 부임하여 천노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전 탐라 만호 박도손을 살해하여 심해에 유기했다.

3) 김유(金庾)의 목호토벌 실패와 만호부 설치 요구

공민왕 15년에 순문사 김유(金庾)가 병사를 모집하고 병선 100척을 가지고 목호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는데, 이를 기화로 목호들은 원에 만호부 설치를 요구하였으나, 공민왕 16년에는 제주를 고려에 환부하게 되었다.

4) 공민왕 18년에는 목자(牧子) 합적(哈赤) 등의 횡포로 관원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려사57권 지리지).

공민왕 21년(1374) 목호들이 명나라 간선어마사 유경원(劉景元), 고려 목사 이용장(李用臧), 고려 만호 안방언(安邦彦) 등을 살해했다.

 

2. 고려 내정 간섭 

고려 공민왕 5년(1356)에는 목호들이 탐라의 원 예속을 요구하였고, 공민왕 15년(1366)에는 전라순문사 김 유(金庾)의 목호 토벌 실패를 기화로 탐라의 원 예속을 요구하는 등 고려의 정책에 번번이 간섭했다.

 

3. 탐라민의 재물 약탈과 부역 강요 

목호들은 비호 세력의 힘을 얻어 탐라 원주민의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고 노역에 강제 동원도 했다.

 

Ⅵ. 목호 토벌대의 편성과 출진

 

 

1. 목호 토벌의 결의 

공민왕 23년(1376) 4월에 신생 명 나라는 예주부사 임 밀(林密)과 자목대사 채 빈(蔡斌)을 파견하여 양마(良馬) 2,000필을 헌마해 주기를 목호들에게 강력히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하여 주모자 목호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이 헌마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과 명나라는 간선어마사 유경원(劉景元), 고려 관원 목사 이용장(李用臧)과 만호 안방언(安邦彦)을 살해하고 병사 300명을 살해(공민왕 21년; 1374)한 책임을 물어 목호를 토벌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2. 토벌대의 편성 

ㅇ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楊廣道, 全羅道, 慶尙道)……최영(崔塋)

ㅇ 도병마사(都兵馬使)……염흥방(廉興邦)

ㅇ 양광도 상원수(楊廣道 上元帥)…이희필(李希泌)

ㅇ 양광도 부원수(楊廣道 副元帥)…변안렬(邊安烈)

ㅇ 전라도 상원수(全羅道 上元帥)…목인길(睦仁吉)

ㅇ 전라도 부원수(全羅道 副元帥)…임견미(林堅味)

ㅇ 경상도 상원수(慶尙道 上元帥)…지윤(池奫)

ㅇ 경상도 부원수(慶尙道 副元帥)…나세(羅世)

ㅇ 삼도조전원수겸 서해(황해도) 교주(강원도) 양도 순문사(三道助戰元帥兼 西海 交州 兩道 巡問使)…김유(金庾)

ㅇ 양광도 순문사(楊廣道 巡問使)…유연(柳淵)

ㅇ 전라도 순문사(全羅道 巡問使)…홍사만(洪師萬)

 

3. 병력

ㅇ 선박……314척

ㅇ 병사……25,605명

 

4. 목호 토벌 출진과 경로 

ㅇ 고려 공민왕 23년(1374) 7월 하순 최영 장군은 목호 토벌의 조서를 받들고 출진하였다.

ㅇ 삼도 병사를 영산(榮山)에 집결시키고 최영 장군이 열병 훈시

ㅇ 8월 12일 진도에 집결하여 화합하고, 소한도(所閑島), 보길도(甫吉島)에 도착

ㅇ 8월 24일 추자도(楸子島)를 향하여 보길도를 출발

ㅇ 8월 27일 추자도 정박

ㅇ 8월 28일 비양도(飛揚島)를 향하여 추자도 출발

ㅇ 8월 28일 명월포 도착

 

Ⅶ. 명월포 상륙과 추격전

 

최영 장군이 지휘 하에 병선 314척, 병사 25,605명이 공민왕 23년(1374) 8월 28일 명월포에 도착한 후 병선 11척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를 전개했다.

 

1. 귀순 선무와 목호의 저항 

먼저 전 탐라 목사 박윤청(朴允淸)을 파견하여 목호들에게 귀순을 권고했으나, 목호는 왕의 조서를 찢고, 먼저 상륙한 11척의 병사를 살해하고, 수괴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기병 3,000기의 병력으로 저항함에 상륙이 지연되자, 최 영 장군은 군율을 엄히 하는 포고를 내리고 병사를 격려하여 마침내 명월성을 점거했다.

 

2. 추격전 

주력 부대는 격파되고, 일부 잔당은 귀덕현(歸德縣)을 거쳐 애월현(涯月縣)으로 퇴각하였고, 일부는 명월(明月)-어름비오름(氷非)(애월읍 어음리)-밝은오름(明近)(한림읍 상명동)-거믈오름(今勿)(한림읍 금악리)-새별오름(曉星)(애월읍 어음리)를 거쳐 한라산 남쪽으로 퇴각 후 집결하여, 연래(延來)(猊來)(서귀포시 상․하예동)-홍로(洪爐)(서귀포시 동.서홍동)을 거치며 쫓기어 범섬으로 퇴각했다.

 

Ⅷ. 목호 섬멸과 고려 주권통치의 실현

 

1. 목호의 최후 

최 영 장군은 부사 정 룡(鄭龍)으로 하여금 병선 40척으로 범섬을 포위하여 목호 괴수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목호 괴수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은 바다에 투신 자결하고, 답실만(答失巒) 일명 석다시만(石多時萬) 등 잔당을 섬멸하여 목호의 난이 평정되고, 동시에 원나라의 잔당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2. 토벌군의 회군  

목호 토벌군은 공민왕 23년(1374) 9월 23일 명월포에 집결하여 회군 길에 올라 동년 11월 3일 목포에 도착하고, 평정 상황을 개경에 보고하며, 간선된 양마 1,700필 중 837필을 우선 개경으로 보내었다.

 

3. 탐라의 평화 회복과 고려의 주권 통치 실현

 

최 영 장군 휘하의 토벌군은 1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목호를 섬멸하고, 몽고(원)의 잔당을 제거함으로써 탐라(제주도)는 평화를 회복하고, 고려의 주권통치 지역이 되었다.

 

Ⅸ. 무민공(武愍公) 최영 장군의 정신 선양

 

1. 선양의 필요성  

내우외환의 국난 중에 무민공 최영 장군이 발휘한 정신은 그 공적에 비해서 발현시켜 기릴 기회가 적었으나, 새로운 시대의 역사의식으로 장군의 정신을 재조명하여 온 국민에게 선양함으로써 자주적으로 민족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굳은 결의를 지니게 해야 한다.

 

2. 무민공 최영 장군의 정신  

최 영 장군의 정신으로 선양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주 호국 정신

① 강인하고 용감하며 용병술에 뛰어난 장군이었다.

② 왜구 및 홍건적과 목호를 섬멸하여 외적의 침입을 근절시켰다.

둘째, 애국 충절 정신

① 조국 수호에 헌신한 일생이었다.

② 랴오뚱(遼東) 정벌을 기도한 지장(智將)이었다.

③ 이성계 등 신진 세력에 대항하여 왕권을 수호하려한 충신이었다.

셋째, 위민 봉공 정신

① 위민 정신으로 추자도민에게 그물 짜는 법을 가르쳤다.

② 군민 화합을 도모하며, 민폐를 근절하고, 목민관을 선도했다.

넷째, 청렴 정신

① 평소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강조했다.

 

Ⅹ. 제언

 

ㅇ고려 시대 탐라사의 집중 연구가 필요하다

ㅇ최 영 장군의 사당 또는 동상을 건립하여, 국민정신 교육도장으로 삼는다.*

 

 

※ 참고 문헌

 

고창석. 고대 고려시대 제주도사 연구

고창석. 여․원과 탐라와의 관계(논문집)

고창석. 원대의 제주도 목장(제주사학), 제주대학교인문대사학과, 1985.

고창석. 원․명 교체기의 제주도, ≪탐라문화≫,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85.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서울, 1984.

사회사상사. ≪교양인의 동양사(상)≫, 도쿄, 1985.

나카무라신타로오(中村新太郞). ≪일본과 조선의 2000년(상)≫,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