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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유대인은 어떻게 박해를 받아 왔는가

간천(澗泉) naganchun 2013. 3. 1. 09:21

 

유대인은 어떻게 박해를 받아 왔는가

 

 

 

 

유대인이란

유대인은 헤브라이인, 이스라엘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정의는 어렵다. 종교적 요소와 인종적 요소의 두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1, 유대교인일 것.

2. 어머니가 유대인일 것.

등의 어느 조건을 갖추면 유대인이 된다. 전자는 종교적 요소이고 후자는 인종적 요소로 정의 되는 것이다.

실제 이스라엘 국회는

“유대인이란 유대인 내지 유대교에로 개종한 자를 어머니로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정의로 입법화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구애되는 것은 박해, 차별, 학살의 역사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집트에서의 박해와 해방

구약성서에 따르면 유대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현재 이라크 남부)에서 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부근)에 이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주민>이라는 의미의 <헤브라이인>이라 불렸다.

역사상 기록에 나타난 유대인 박해의 시작은 이집트에서이다.

기원전 17세기경 헤브라이인은 가나안땅에서 고대 이집트로 집단이주하여 노예로서 생활하였다 한다. 그 후 기원전 13세기경 제19왕조 때에 이집트의 헤브라이인 지도자 모세가 중심이 되어 약 60만 명의 헤브라이인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하였다. 내용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후 성스러운 시네산 정상에서 여호와와의 계약을 받았다. 이것이 후에 유대교에 이어진다. 이 일은 유대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최초의 박해이고 유대교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죽은 후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은 유대인은 요르단강을 건너서 예리고 지역을 정복하고 그 후 기원전 11세기경에는 사울왕의 지휘 하에서 건국하여 후계자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왕의 치세에서 최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영화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여 솔로몬왕 사후 왕국은 분열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대국으로 분할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의 박해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 앗시리아제국에, 그리고 남쪽의 유대국은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왕국에 의하여 정복당하였다. 그때 유대국 사람들은 강제로 바빌로니아로 이주하고 다수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다. 이것이 제2의 유대인 박해이다.

그런데 이 신 바빌로니아도 아가메네스조의 페르시아에 멸망하여 신 지배자인 페르시아는 비교적 관대한 제국이라서 착실히 납세하고 모반이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한 생활은 물론 습관이나 문화도 보호되었다. 한편 앗시리아는 역사상 가장 가혹한 속국지배로 알려져서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주모자와 그 측근은 신체의 가죽을 벗기고 벽에 붙이는 형을 내리기도 하였다.

페르시아의 관대함은 유대인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기원전 538년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귀환할 수 있도록 허가되어 그들은 귀환 후 신전을 세우고 유일신인 여호와를 믿는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그 후 이들을 유대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종교적 박해

<출애굽>과 <바빌로니아 강제이주(바빌로니아 포수)>를 보면 유대인은 3000년 전부터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국가나 집단으로가 아니라 <민족> 단위로 박해를 받았다. 그 후 1000년 후에 유대인 박해를 결정짓는 역사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예수 크리스트의 죽음이다.

예수는 채찍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로마제국에 고소한 것은 유대인이고 은화 30량으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도 유대인이다. 예수를 박해하고 말살한 것은 로마제국도 아니고 헤롯왕도 아닌 유대인이었다.

예수 사후 기독교는 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로마제국시대 기독교도는 가지가지의 차별, 박해, 학살을 당하였다.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어 이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그때까지 받은 손해배상마저 보증되었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반동하듯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십자군에 의한 박해

중세에 들어서도 유대인에 대한 학대는 이어졌다. 예를 들면 십자군이다. 1096년 당시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십자군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1096년 십자군이 탄생하자마자 예루살렘 성지까지 원로의 원정에 필요한 장비나 자금이 부족분을 라인강 연안의 부유한 유대인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과 살육을 감행하고 자금과 물자를 조달하였다.

이 유대인 지역 약탈 살육 행위는 라인강을 따라서 슈바이에르(1096년 5월 3일), 보루무스(1096년 5월 18일), 마인즈(1096년 5월 28일), 게룬(1096년 7월 8일), 노이스(1096년 7월 14일) 등에서 약탈과 살육이 행해졌다.

1회 십자군이 1098년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라틴 왕국>을 건설하였을 때 그 지역에 남아있던 유대인을 유대교회당(시나고구)에 가두어 불을 놓아 학살하였다.

제2회(1147~1148), 제3회(1189~1192) 십자군 때에도 박해는 행해져서 정치적 위기나 사회 불안, 인재, 천재, 흉작, 페스트 창궐, 등을 계기로 민중이 감정이 격앙으로 인한 극도의 불만 분노, 종교적 광신, 편견, 오해 등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되풀이되었다.

한편 유대인을 박해하는 데에는 다른 효과를 노렸다. 유대인은 금융업에 대부분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을 박해함으로써 부체 장부를 지워버리는 편리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고 부체가 많은 영주는 종교문제를 구실 삼아 채권자인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다른 영지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대교와 기독교는 함께 구약성서를 근본으로 하는 동근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이 학살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기독교 사회의 이질 분자로서의 박해

유대인 차별은 중세 이래 유럽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 근거로서는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곧 유대인은 유대교신자로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사회에서는 사회적 이질 분자이고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토지 소유를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자영 농민이 될 수가 없었다. 길드(Guild、=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서구 도시에서의 상공업자의 직업별 조합) 가입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도시 상공업자로서도 자립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통상적인 직업에서 배제된 유대인은 걸인, 도시청소인, 피혁 다루기 등의 천한 직업에만 종사해야 했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이자이득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워하였으므로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소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게토(ghetto)라는 유대인 전용 주거지역에서 살아야 했다. 게토는 좁은데 많은 유대인이 열악한 황경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었다.

 

반셈주의자로서의 박해

근대에 들어서 이런 상태는 조금씩 변화하였다. 18세기 계몽시대에는 신분사회의 부정, 시민 평등이 주창되면서 지금까지 종교적 차이로 차별 받던 유대인에 대하여도 사회적 평등이 적용되게 된 것이었다.

유대인 중에서도 이런 계몽사상에 공명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유명한 것은 음악가 멘델스존의 조부는 계몽주의자로서 유대인이 기독교나 유럽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유대교 신자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사회에 동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종교적 차별에서 이제는 인종적 차별을 구별하여 새로운 유대인차별 사상을 반셈주의(Antisemitism=19세기 이후에 나타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차별하는 입장)라 한다.

이 반셈주의의 특징은 종교적 의미의 유대교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사회에 동화한 유대인이야말로 박해의 대상이라고 한다는 점, 유대교를 신앙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점. 산업사회의 진전에 따라 발생한 도시문제, 빈곤, 도덕적 퇴폐, 기독교에서의 이탈, 배금사상 등의 근원에 유대인이 있다고 단정하는 문제. 등으로 종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반유대주의로 변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확대된 반유대주의는 마치 이런 형태로 반셈주의였다. 히틀러가 신봉한 것도 이것이었다.

또 1881년에는 동유럽에서 <포구롬(Pogrom)>이라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 파상적으로 일어나 유대인 십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포구롬>이란 러시아어로서 유대인에 대한 약탈, 학살을 의미한다.

 

히틀러 나치에 의한 박해

히틀러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박해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대인 박해이다. 이때 유대인 박해는 1933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라 하기보다 인종적 이유에서였다.

1850년대 프랑스 외교관 고비노(Joseph Arthur Comte de Gobineau 1816년 7월 14일 - 1882년 10월 13일)는 인종적 우열을 논한 <인종불평등론>을 발표하여 그 중에 아리아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원래 DNA구조가 해명된 것은 1953년으로 고비노의 설에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아리아인이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으로 기원전 1500년 경 이후 서북 인도나 이란에 진출한 사람들을 말한다. 인종으로서의 아리아인이 존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나치정권은 이 책을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정당화하는 성서처럼 이용하였다. 여기에 이전의 종교적 증오가 더해져서 단순한 차별에서 박해, 학살로 강화된 것이었다.

나치스정권 하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 박해, 학살은 처참한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대인을 법률의 보호에서 제외시키는 특별입법을 가결하였다. 이것은 재산권, 생존권, 재판권의 소실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당하게 체포되고 재판도 없이 처형되는 것이 인정되었었다.

이 시기의 유대인 박해는 인간이 얼마나 간단히 광기에 빠지게 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근면과 합리성을 중시한 대국이다. 나치스정권이 탄생하기 전의 와이마르헌법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고 칭찬을 받았었다. 이런 나라가 표변한 것이었다.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박해나 학살이나 인체실험은 인간의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음을 시사한다. 최종적으로 600만 명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다시 더 무서운 것은 <밤과 안개>라는 책에 쓰인 인체실험이나 학살은 상상을 초월한다.

<밤과 안개>는 유대인 프랑클(Viktor Emil Frankl,1905~1997, 빈 태생)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저서로서 이미 역사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또 유대인 차별이나 박해는 나치에 의해서만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카틴(Katyń) 숲의 대학살>이다.

이 사건은 1943년 4월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교외의 카틴 숲에서 독일군이 4000구가 넘는 폴란드군 장교의 시체를 발견한 데서 시작한다. 독일의 퀘펠스 선전상은 라디오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고 소련을 격하게 비난하였다. 한편 소련 측에서도 독일군의 범행이라고 반론을 폈다. 이 사건은 일찍이 소련의 범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독일 나치스를 악한 자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연합국측이 숨겨 두었다가 1990년 겨우 소련이 자국의 소행임을 인정하였다.

 

유대인이 박해당하는 이유

유대인은 어째서 이렇게 박해를 받아야 했는가?

일반적으로 유대인이 박해 당하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라 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때문에 기독교사회에서 돌림을 받는다.

예수를 배신한 자는 유대인인 유다이다. 그런 때문에 기독교도로부터 반감을 샀다. 또 유애인은 자신들은 신으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선민>이라 하는 점도 반감을 불러오는 이유라 한다. 단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반유대주의 자에 의하여 더욱 강조되고 이용된 점도 있다.

둘째, 유대교의 관습은 독특한 것으로 그들은 그 지역사회의 문화에 동화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주위의 사회로부터 돌림을 받았다.

토지를 가지지 않은 유대인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교육과 돈 특히 돈을 고집하는 것은 비천한 것이라는 것이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한 것이고 현대에 있어서는 금융은 화려한 직업이지만 근대까지는 천한 직업으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같이 취급되었다.

셋째, 국내에 정치적 불안이 있으면 위정자는 그 불안 해소하기 위하여 먼저 유대인에게 창살을 돌렸다. 히틀러가 그 전형이었다.

 

현재의 상황

1894년에 발생한 드레퓌스 간첩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슬(Theodor Herzl, 1860년 5월 2일 - 1904년 7월 3일)이라는 인물의 지도하에 1896년에 제1회 국제시오니스트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시오니즘>이라는 운동은 유대인국가 건설 운동이었다. 유대인의 옛 고향인 <시온 언덕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미국과 영국의 지지 하에 국제연합은 아랍계주민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국가 <이스라엘> 건국을 인정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지금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재흥시켰다. 그러나 그 주변의 중동국가들처럼 석유가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은 아무런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현재에도 팔레스타인인과 대립하고 있다.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과의 분쟁은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쳐서도 아직 종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상호 포격과 공습 테러 등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고 있다.

유대인이 최신무기로 팔레스타인인에게 대항하는 것은 그들의 테러가 두려워서인데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행하는 것은 유대인과 같은 하이테크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박해와 학살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싸움은 이미 3000년의 역사를 새기고 있다. 이 역사의 저류에는 개체를 초월한 민족 유전자가 잠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

 

*참고

현재의 이스라엘 인구 구성

이스라엘 인구--750만 명

구성 비율

1. 유대인 75.4%

2. 아랍인 20.3%

* 1가구당 자녀수

1. 유대인 가정 2.8명에서 2.9명으로 증가

2. 아랍인 가정 3.97명에서 3.84명으로 감소

*자료-2009년 12월 31일 이스라엘 중앙통계국

* 1년간 출생 자녀수 16만 명

* 1년간 이민자수 14만 5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