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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드레퓌스 사건>에 대하여

간천(澗泉) naganchun 2013. 3. 9. 06:16

 

<드레퓌스 사건>에 대하여

 

 

 

지식인의 양심 상징 '드레퓌스 사건' 佛, 119년 만에 관련문서 전체 공개

파리=이성훈 특파원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 이유로 누명 쓴 군인, 교수·소설가 등이 결백 외쳐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공개편지 쓰고 체포되기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국가 권력과 이에 맞선 지식인의 양심을 상징하는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한 비밀 문건들이 100여년 만에 일반인에 전면 공개됐다.

프랑스 국방부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한 군사 비밀문서의 원본을 스캔 작업을 통해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에 공개했다고 뉴욕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은 반(反)유대주의 정서가 팽배하던 1894년 프랑스군이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포병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를 독일 스파이로 지목해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약 1년 후 새로 부임한 정보 책임자가 진범을 밝혀냈지만 프랑스군은 그를 오히려 해외로 전출시켰고, 군법회의는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프랑스 사회는 양분됐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가진 다수의 대중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다.

 

기자·교수·소설가 등 지식인들은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드레퓌스를 옹호한 신문사가 폐간되는 등 언론과 지식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탄압도 극에 달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로로르(L'Aurore·여명)'에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공개편지를 썼다. 당시 발행 부수 1만부였던 로로르는 이날 신문을 30만부 찍어 파리 시내에 뿌렸다. 에밀 졸라는 중상모략으로 여론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지만, 이를 계기로 여론이 반(反)정부로 돌아섰다. 프랑스 정부는 결국 이듬해 9월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양심적인 지식인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470개의 문서와 84개의 서류철 등 드레퓌스 사건 당시 관련 서류 일체이다. 조사 보고서와 증인 진술, 당시 주요 인물에 대한 보고서 등도 포함됐다. 프랑스 정부는 이 문건을 인터넷에 무료 공개함으로써 누구나 손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이상 2013년 3월 9일 조선일보에서)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에 대하여

 

간첩 의혹

 

1870년 7월 19일부터 1871년 5월 10일까지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인 보불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이 부과되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었다. 게다가 1882년에는 금융공황이 일어나 많은 투자은행이 도산하고 저축이 없어진 사람들은 금융계를 잡고 있는 유대인을 미워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1894년 프랑스에서 간첩 의혹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육군 내부에 독일에 비밀정보를 흘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누설한 기밀문서의 명세서 필적은 프랑스 육군참모본부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구체적인 증거는 물론 드레퓌스가 금전문제를 가지고 있다든지 갑자기 돈이 잘 돌아간다든지 하는 상황증거도 없기 때문에 드레퓌스의 체포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반유대계 신문인 <자유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곧 유대인은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이고 그 매국노를 군부가 비호하고 있다고 논하여 군부의 우유부단함을 규탄하였다.

이에 군부는 서둘러서 간단한 조사 후 1894년 드레퓌스 대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시종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유죄로 종신형이 선고되어 군적을 박탈당하고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남미의 프랑스영인 기아나에 있는 데빌스도( Devil's Island) 소위 <악마도>라는 섬에 수감되었다.

드레퓌스의 아내와 형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호소하고 재심을 요구했으나 세론은 냉정했다.

이 사건에는 두 가지의 수수께끼가 있었다. 프랑스 군부가 상세한 조사도 하지 않고 드레퓌스를 유죄로 하고 사건의 해결을 서두른 것과 죄가 없을는지도 모르는데 세론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세론은 군부는 기밀누설을 허용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고 유대인은 충성심이 추호도 없는 매국노라고 했다.

시대는 19세기말 유럽은 반유대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반유대주의자나 국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기회로 하여 반유대 캠패인을 벌렸다. 유대인이 프랑스를 팔았다고 했다. 유대계 프랑스인 가운데에는 드레퓌스에 동정하여 구원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진범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새로 프랑스 군부정보부장으로 임명된 비카르 중령은 진범인이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밝혀내었다. 만일 사실이 밝혀지면 군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군은 전력을 경주하여 사실을 지우는 데에 힘을 썼다. 먼저 진상을 아는 비카르 중량을 좌천시키고 다음으로 드레퓌스 형에게 고발당하여 군법회의에 회부된 에스테라지 소령을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서 비카르 중령을 문서위조죄로 고발하였다.

그런데 문호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사건을 일변시켰다. 졸라는 군법회의는 군부에 의하여 왜곡된 허위 심판이라고 규탄하였다. 졸라의 고발은 세론을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재심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군부나 왕당파나 가톨릭교회 등 보수 세력은 맹 반발하였다. 군부로서는 군법회의의 재연은 군의 위엄을 해치고 가톨릭교회로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유대인은 오랜 적이었다. 게다가 인종차별이 있었고 드레퓌스파는 열세였다. 이로써 졸라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여 영국으로 망명할 수박에 없게 되었다.

 

재심과 명예 회복

 

드레퓌스대위의 재심을 요구하자 드레퓌스파와 그 반대파간의 항쟁은 이윽고 국정에까지 미쳤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공화제를 지지하는 구릅과 왕당파구릅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와 연결된 것이었다. 실은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는 공화제가 확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 후도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가 처형된 후에도 왕당파는 아직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곧 프랑스혁명 발발 후 100년간이나 왕당파와 공화당파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1898년 8월 드레퓌스 유죄를 결정짓게 한 증거가 위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다시 1899년 2월에는 드레퓌스파의 루페가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열세였던 드레퓌스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899년 8월 재심이 시작되어 군은 점점 추궁당해야 했다. 군은 체면 살리기에만 급급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체면을 살리려면 유죄밖에 없었으나 세론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재판은 타협안으로 결정되었다. 드레퓌스는 다시 유죄가 되었으나 형기는 종신형에서 10년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군으로서는 오직 한 가지 피할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드레퓌스는 이에 납득하지 않았다. 다시 재심을 청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드레퓌스에게 대통령의 특사로 드레퓌스를 석방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드레퓌스는 일보도 물러서지 않고 완전 무죄를 주장하며 1906년 7월 마침내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아내었다.

 

사건의 영향

 

드레퓌스 사건은 단순한 간첩사건으로 시작되었는데 용의자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정치 항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침 당시 신문이 보급되기 시작한 점도 도움이 되어서 세론이 큰 힘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중의 영향력을 잘못 판단한 가톨릭교회는 그 지위가 크게 실추하였고 왕당파는 정치생명을 완전히 잃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공화제를 반석위에 세우고 프랑스의 역사마저 바꾼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을 취재하였던 기자 테오도르 헤르슬(Theodor Herzl, 1860년 5월 2일 - 1904년 7월 3일)은 당시 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목격하고 유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시오니즘 운동을 제창하여 결국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