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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간천(澗泉) naganchun 2013. 3. 22. 03:47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반란의 배경

 

기원전 202년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 의하여 한니발 장군을 패퇴시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잡게 되자 주변 여러 나라를 차례 차례로 속주로 병합하였다. 침략 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 포로나 세금을 내지 않은 속주민 등을 노예로서 데리고 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예가 증가하여 그 가격은 하락하고 학대가 한층 더해졌다.

국외에서는 반로마 투쟁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스페인에서는 로마의 전 장군인 세르토리우수(Sertorius) 가 원주민과 함께 봉기하고 소아시아에서는 폰도스의 미소리다테스(Mithridates) 가 반기를 들었다. 발칸반도에서는 트라키아인(Thracian)이 반항하고 지중해에서는 해적이 날뛰었다.

 이 무렵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중요도시인 카푸아(Capua)에서는 탈주 노예들이 있었다. 남 이탈리아에는 대규모의 농장이 있어서 거기에는 많은 노예가 일하고 있었다. 또한 카푸아에는 검투사양성소나 투기장이 있었다. 검투노예 글라디에이터(Gladiator)에는 가리아나 발칸에서 데려온 포로가 많았고 그들은 로마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반항적이었다. 그들은 로마인의 오락을 위하여 친구끼리 맹수처럼 싸워서 죽이곤 하였다.

 

반란 봉기

 

BC73년경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가 탈주를 주창하였다. 그는 “로마인의 구경거리가 되기보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자.”하고 앞장 선 것이었다. 그들은 부엌을 습격하여 식칼과 꽂이를 빼앗고 74명이 탈주하였다. 시가로 나온 그들은 닥치는 대로 마차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베수비우스산(Vesuvius)에 농성하였다. 거기에 많은 노예들이 모여들었다.

로마는 이들은 단순한 탈주 노예라고 가볍게 판단하고 3000명의 군단을 파견하여 산정으로 이르는 외길을 막아 노예들이 아사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반대 사면에서 포도 줄기 사다리로 산을 내려서 로마군을 급습하여 크게 승리하고 다량의 무기를 입수하여 노예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반란군의 연전연승

 

무기를 손에 넣은 노예군은 베수비우수산 주변 고을을 차례차례로 점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에서는 우아리우수(U~ariusu) 와 1만 2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양쪽으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우아리우수의 본대와 대치하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는 비밀리에 별동대를 급습하여 지휘관을 전사시키고 곧바로 우아리우수 본대를 급습하여 노예군은 캄파니아(Campania)평원으로 진출하였다.

6월의 캄파니아 평원은 수확기라서 많은 노예가 수확물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병력은 2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 교양이 있는 도시노예들은 참가하지 않고 로마에 반항적인 도시도 원조해주지 않았다. 노예군은 자력으로 필수품을 조달해야 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원군이 남하하였다. 노예군은 증가하고 있었으나 장비가 불충분했다. 그러므로 로마군과의 대결을 피하여 이탈리아 남단 루카니아 (Lucania)지방으로 피하였다. 여기서 두 파로 나뉘어 스파르타쿠스는 메타폰토 우무(Metaponto~umu) 로 별동대 구리고수(carried forward) 는 코센자(Cosenza )를 점령하였다.

두 부대는 토우리이(Tourii)에서 합류하여 여기서 월동하였다. 이 무렵에는 노예군은 7만 명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노예를 묶었던 쇠사슬은 무기 공장에서 무기로 만들어졌다.

 

고향을 향하여 북상

 

BC 72년 봄 노예군은 훈련이나 장비의 충실로 강력한 군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나아갈 목표가 없었다. “알프스를 넘어서 제각각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알프스를 넘으면 거기는 로마가 아니고 갈리아(Gallia)나 트라키아(Thracia)로 돌아가서 로마와 싸우는 부족과 합류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전군은 메타포토우무( Metaponto~umu) 에 집결하여 알프스를 목표로 북상하였다.

노예들은 식량을 약탈해가면서 행군하였다. 그러므로 후발대가 지나갈 때는 약탈할 식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후발대인 구리고스대는 하는 수 없이 본대에서 이탈하였는데 그곳을 로마군은 급습하여 구리고스는 전사하고 로마군은 처음으로 승리하였다.

노예군은 쫓아오는 로마군을 떨쳐버리면서 이탈리아 중부에 왔다. 농장에서 많은 노예가 탈주하여 왔다. 전세가 일시 회복되었다. 노예군은 피케누무(Pikenumu) 에서 로마군을 만나 이를 격파하였다.

아페닌니(Appennini)산을 넘어 보강의 평야에 이르렀을 때 노예군은 12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 앞에는 1만 명의 로마군이 막아섰는데 이를 격파하여 앞에는 로마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마 크라수스(Crassus) 의 등장

 

노예군은 알프스를 넘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와 달라서 식량 조달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알프스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의 고향인 트라키아가 로마군에 제압당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목표로 하던 고향을 잃고 알프스를 넘을 시기를 놓치고 만 노예군은 알프스를 넘을 것을 단념하고 식량이 풍부한 시칠리아를 새로운 목표지로 정하였다.

노예군은 힘들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원로원은 이들을 맞아 격파할 것을 명하였다. 양군은 비게슴 부근에서 대결하여 로마군은 다시 패하였다. 원로원은 토벌사령관으로 대부자인 크라수수를 임명하고 6군단을 주었다. 이 군단의 비용은 모두 크라수수 사비로 충당하였다. 원로원에는 이제 대군단을 양성할 힘이 없었다. 다시 잔존부대를 합하여 합계 10군단 6만 명의 부대가 편성되었다.

BC 72년 11월의 일로서 노예군이 봉기해서 1년 반이 경과하는 시점이었다.

 

반란군 시칠리아 도항 실패

 

노예군은 아베닌산맥 동쪽을 남하하고 크라수수는 이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노예군의 강함에 놀란 크라수수는 원로원에 폼페이우수와 루쿠루수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크라수수는 노예군과의 직접대결을 피하여 원정군의 귀환까지 시간을 벌 작전을 개시하였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구레타의 해적을 달래어서 노예군과 미토리다테스(Mithridates VI) 와의 사이를 벌려놓았다. 또 반로마적인 이탈리아의 도시에는 로마시민권을 주어서 노예군과 협력하지 않도록 하였다.

노예군을 지지하는 것은 그리스의 해적뿐이었다. 그리스의 해적은 노예군을 시칠리아에 운반할 것을 약속하고 노예군은 레기움(Regium)으로 급히 나아갔다. 모처럼 도착한 레기움에는 배 한척도 없었다. 그리스 해적도 이미 매수되어버린 것이었다. 노예군은 작은 배로 도항하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크라수수는 노예들을 반도에 가두어 놓으려고 포위 작전을 개시하였다. 길이 55 킬로미터에 걸쳐 깊은 도랑을 파고 이 위에 성벽과 철책을 세웠다. 마침 스페인 원정군 폼페이우수(Pompeius) 가 귀환하였다. 이들은 역전의 정예부대였다. 노예군과 로마군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최후의 전투

 

포위망에 갇혀진 노예군은 강행 돌파를 감행하였다. 눈앞에 길은 열려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목표가 없었다. 노예군은 그 날을 살기 위하여 약탈을 되풀이 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구심력도 쇠퇴하여 별도의 행동을 하는 부대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본대에서 떨어진 부대는 개별적으로 격파되기 시작하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잔존 부대를 집결시켜 쫓아오는 로마군을 맞아 싸웠다. 노예군은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 새벽부터 일몰까지 싸웠다. 형세는 서서히 역전하여 노예군 1만 5천 명이 전사하고 5천 명은 도망하였다.

노예군은 북으로 진군할 것을 체념하고 남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적의 집요한 공격에 노예군은 피로해갔다. 스파르타쿠스는 부룬디시움(Brundisium)에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의 탈출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소아시아에서 미도리다데스를 격파한 루쿠루수((Lucullus)가 부룬디시움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란군의 전멸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적은 쳐들어온다. 루쿠루수와 크라수수의 누구와 싸울 것인가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수를 선택하였다. 노예군은 반전하여 메타톤도움 북서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노예군에게는 패하는 것을 허용할 수가 없어서 처참하게 싸웠다.

차차 노예군은 열세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열세를 만회하려고 일 부대를 이끌고 크라수수의 본진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적진은 깊고 부하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단기로 돌진하였으나 창에 찔리어 낙마하고 거기서 로마군에게 찔리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여 최후에는 누구의 시체인지도 모를 정도로 처참해졌다.

스파르타쿠스가 넘어져서는 일방적인 살육으로 변하였다. 여기서 6만 명의 병사가 전사하였다. 포로가 된 6천 명은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Appia)가도에서 책형(몸이 찢기어 죽는 형벌)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새 밥이 되었다. 결국 노예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로마에서 도망치지도 못하였다. 때는 기원전 71년 무렵으로 반란을 일으켜 3년이 채 되지 않았었다.

 

그 후의 로마

 

최후로 전장에서 도망친 노예는 2만 명인데 그들은 그 후에도 싸워서 일시 부룬디시움반도를 지배하였다. 반항은 그것뿐이었다.

BC70년 폼페이우수는 소탕전을 벌여 노예군을 전멸시켰다.

이 반란은 노에의 처우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혹사하여 반항하게 나는 것보다 자주적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 득이라고 생각했다. 노예의 생활은 서서히 개선되었다. 제정기에 들어서는 사슬이 풀리고 결혼하여 가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의 일부를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시민이 열광하던 검투사의 시합은 404년까지 맹수연기는 523년까지 계속되었다. 시합은 콜로세움에서 시행되었다. 시합에서 유혈을 보는 것이 로마군을 강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노예군을 격파한 것은 크라수수였다. 그 공적은 소탕전을 벌린 폼페이우수의 것이 되었다. BC70년 크라수수와 폼페이우수는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였다. 공화제를 지지한 중소농민은 몰락하고 로마는 제정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 후 크라수수와 폼페이우수 그리고 카이저는 제1회 3두 정치를 시행했다. 시리아의 통치권을 얻은 크라수수는 바이디아 원정을 하였으나 BC53년 가루라에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얼마 없어 폼페이우스는 카이저에게 패하여 결국 이집트에서 살해되었다. 카이자의 독재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참고자료 신판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도이마사오키(土井正興)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