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켈트의 여왕 부디카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3. 1. 18. 06:02

 

 

켈트의 여왕 부디카 이야기

 

 

 

<부디카>상(런던)

 

 

<부디카>에 대하여

이케니(Iceni)족은 BC 1세기에서 AD 1세기까지 영국의 이스트 앵그리아(East Anglia)지방(주로 현대 노폴크 (Norfolk) 주 및 사폴크 (Suffolk)주 북부주변)을 지배하던 민족이다. 소금 생산과 유통으로 유복한 토지였다. 로마의 침략 후에는 형식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민족의 장은 왕으로서 토지를 통치하고 로마의 지배층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족의 장으로서 왕이었던 푸라수다구스(Prasutagus)가 AD 60년(로마 네로황제시대)에 죽자 영토의 절반은 로마에 넘기고 그 절반은 아내인 부디카(Boudica)와 두 딸의 영토로서 통치하였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그 토지를 몰수하고 두 딸을 능욕하며 부디카를 채찍질 하는 등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로마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부디카(Boudica)는 켈트어로 숭리(빅토리)라는 뜻인데 같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빅토리아여왕(재위: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은 부디카의 강한 어머니로서의 이미지와 악에 대항하는 과감한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이미지와 겹치게 하여 부디카의 인기를 높이고 웨스트민스터 다리에 상을 건립하였다. 자유를 구하여 반기를 든 여왕으로서 영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부디카>의 유물 목걸이 발견

2005년 4월 영국 노폴크 (Norfolk=잉글랜드 남부) 주의 어느 농장에서 멋진 고대의 목걸이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목걸이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지고 감정 결과 40년 전에 발견된 목걸이의 일부임이 밝혀졌다.

이 목걸이의 주인이야말로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옛날 브리텐도의 잔인한 지배자 로마제국과 감연히 저항한 고대 켈트 여왕 부디카(Boudica)가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발견된 <부디카>의 목걸이

 

 

여왕 부디카의 이름은 고대 켈트의 자랑스러운 여왕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민족의 존엄을 걸고 이케니족(Iceni=BC1세기경부터 AD 1세기에 걸쳐 영국 동쪽에 살던 켈트족의 일족)을 이끌고 강대한 로마 정규군에 맞 대항하여 싸운 여왕이었다.

 

로마의 영국 침략

AD42년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어 크라우디우스제가 통치하게 되자 브리텐도(영국 본토)는 로마제국의 다음 침략 목표지가 되게 되었다. 이윽고 로마는 치밀한 작전계획 하에 5만의 로마 정규군을 동원하여 여러 곳에서 침입을 개시하여 본격적인 정복이 시작되었다. 상륙한 로마군은 점령지역을 점차 동쪽으로 확대하여 점령된 도시는 파괴되고 로마풍의 원형투기장, 공중목욕장, 거대한 신전 등을 건설하고 로마인을 입식시킬 도시로 탈바꿈 하였다.

거기에 살고 있던 토착 켈트인들은 무기와 토지를 빼앗기고 로마인의 노예처럼 전락하였다. 게다가 무거운 세금을 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 로마는 이들 켈트인을 지배하에 두려고 하지 않고 브리텐도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현지의 권위자 협력자를 통하여 지배하려 하였다. 그럼으로써 로마는 점령에 필요한 경비를 덜 수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 정복 하의 이케네족

잉글랜드 동부의 반도 현재 런던의 북동부 평지에 사는 이케니족도 이처럼 로마인의 지배를 받는 일족이었다. 그러나 이케니족은 켈트인 중에서도 매우 온후한 종족으로 로마에 우호적이었으므로 자치를 허용 받았었다. 그래서 로마는 이 지역에는 약체인 수비대로 두었었다.

이케니족의 족장은 푸라수타구스(Prasutagus)라 하고 그 아내는 부디카(Boudica )라 했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은 없고 15세 13세의 딸이 둘 있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네로로 바뀌자 이케니족에게 비극이 닥치기 시작하였다.

하지 가까운 어느 여름날 부디카와 푸라수타구스는 몇 사람의 종자를 데리고 자신의 목장을 시찰하는 중이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폭풍이 불었다. 갑자기 우레 번개가 친 것이다. 그 소리에 말들은 놀라서 떼를 지어 달리기 시작하였다. 말떼가 아내가 있는 쪽으로 달린다고 생각한 푸라수타구스는 전력을 다하여 달려가서 자신의 말에서 내려 부디카를 덮치고 스스로 달리는 말발굽에 깔리어 중상을 입었다. 아내 부디카는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며칠 후 왕인 푸라스다구스는 숨을 거두었다.

 

네로의 정복지에 대한 횡포

이 사건 이후 황제 네로는 그들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구실로 그들 이케니족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지국의 직할령으로 하려 하였다.

여러 가지의 구실을 붙여서 피정복 민족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갔다. 이것이 로마의 교활한 술책이었다.

푸라수다구스가 죽어서 1개월이 되지 않은 보름달 밤에 로마의 속주장관 데기아누스 가토우수가 2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이 무렵 여왕 부디카와 두 딸은 보름달 의식 때문에 부재중이었다. 이때 대홀에서 잠시 기다리던 로마인들은 두 딸을 데리고 돌아온 여왕에게 기다리게 하였다고 소리 질러 말하였다.

“당신의 남편 푸라수다구스는 아들이 없이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이케니족의 왕은 혈통이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당신의 토지는 몰수되고 로마의 직할지로서 통치됩니다. 이것은 황제 네로가 결정한 일입니다. 아시겠지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부디카는 조용히 이렇게 답하였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듯하였다.

“나는 여왕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딸이 있다. 이케니족의 혈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은 이케니 유산의 절반을 로마황제 내놓을 것으로 유언하였다.”

속주장관은 그녀의 말을 예상했던 듯이 빙긋이 웃었다.

“부디카님 우리 로마제국은 여왕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왕뿐입니다. 당신의 남편인 푸라수다구스는 유산의 절반을 황제에게로 지명한 듯하나 황제는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당신과 딸들은 생활하기에 부자유가 없도록 할 것입니다. 제국은 얼마의 연금을 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나의 유산은 거의가 말과 소입니다. 그것은 모두 로마제국에 바치지요. 그러나 로마제국은 이 여왕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어차피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이오.”

부디카는 냉정하게 말하였다. 그녀의 말은 냉정한 가운데서도 운명적인 결의를 감추고 있는 듯이 들렷다.

 

연회석에서의 사건

이리하여 속주장관과 부디카의 대화는 냉정한 가운데 이어졌다. 이윽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 이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부디카와 두 딸은 왕의 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고 자신의 손으로 적색과 자색의 기다란 옷을 꺼내어 입었다.

여왕은 여자로서는 키가 크고 멋진 금발을 하고 있었다. 눈은 투명하게 푸르러서 마치 아침 햇살이 호수의 수면 같았다. 그녀는 녹색의 공작석에서 분을 꺼내어 눈과 뺨 그리고 이마를 아름답게 화장하였다.

눈처럼 하얀 그녀의 살갗은 매력을 자아내었다.

끝으로 그녀는 금과 홍옥 목걸이를 하고 황금 팔찌를 하였다. 그것은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중대한 결의를 감추고 있을 때에만 행하는 의식이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라는 알림이 있어서 로마의 습관대로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여왕과 딸들은 로마 관리와 호위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대 홀로 향하였다. 로마와 싸우는 한이 있어도 오늘 밤만은 조용히 지내자 하고 기도하였다.

그들 관리와 자리를 함께 하자마자 요리가 노예들에 의하여 운반되었다. 그것은 소고기, 밀 빵 포도주 등이었는데 멋진 청동그릇과 은제 병에 담겨져 있었다.

호위대장의 눈이 식사 중에 이상한 빛을 띠고 여왕의 장녀에게 쏠리는 듯하였는데 처음 식사는 아무런 탈이 없이 진행되었다. 이윽고 딸들이 로마인들 사이를 목이 기다란 술병을 들고 걸어가서 호위대장의 술잔에 따르는 중에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 호위대장은 그 딸의 팔에 손을 뻗치고 저항하는 다른 편 팔도 잡이서 무릎 위에 앉히고 말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포도주 병은 떨어져서 깨지고 새빨간 포도주는 마루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 손을 놓으시오. 대장.” 부디카는 일어서서 소리 질렀다. 그러나 취한 호위대장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으며 더 왕녀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 하였다. 그 순간 여왕의 눈치를 받은 이케니 전사의 한 사람이 감추어 가지고 있던 단검을 꺼내어 호위대장에게 달려들었다. 대장은 순간 목이 잘리어 쓰러졌다. 단말마의 소리와 함께 피가 주변에 흩어졌다. 밖에 있던 로마 병사 일단이 단검을 휘두르며 대 홀로 달려들었다. 대 홀에 있던 10여명의 이케니 남자들은 순간 로마 병사들에게 넘어졌다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로마군의 보복과 반란 봉기

그 후로 일어난 일들은 로마인의 야만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여왕의 성채를 남김없이 약탈하고 살해된 호위대장의 복수라 하여 몇 십 명의 이케니 남자들을 학살하였다. 사자의 얼굴은 무거운 방패로 짓이겨졌다. 성채에서 기르고 있던 작은 강아지마저도 창으로 죽여 버렸다. 살아있는 자는 목을 사슬로 묶고 노예로서 끌고 나갔다. 목장의 소들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끌고 가버렸다. 부디카는 붙잡혀서 나무에 매인채로 상반신을 나체로 하였다. 그리고 살이 찢어질 정도로 채찍을 맞았다. 마치 도둑질을 한 노비를 다루 듯하였다. 두 딸은 로마 병사에 의하여 능욕 당하였다.

이 보름날 밤에 일어난 포학행위는 원래 뿌리 깊은 반로마 감정을 한꺼번에 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부디카는 어둠에서 사는 복수의 여신으로 화한 것이었다. 일족의 다수는 지난밤의 포학행위에 대하여 복수하자고 부르짖고 일어난 것이다.

부디카는 이때 이미 로마와 개전하였을 경우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혼자 고요히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수 백 년 간 무적을 자랑하던 강대한 로마제국인 것이다. 함부로 당할 수 없는 상대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때 로마의 브리텐총독은 로마의 유일한 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나도의 오르도위게스족 (Olde windowcase )을 제압하기 위하여 출정 중이었다.

그들이 모나도를 정복하여 그 주력을 이쪽으로 돌리기까지의 기간은 얼마나 될는지 그리고 이케니의 남자들이 무장을 완료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는지 로마군과 싸우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부족의 힘이 집결 가능한지 또 싸움에 필요한 식량을 어떻게 조달하고 확보하면 좋을 것인지 이런 일들을 그녀는 혼란한 가운데서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가 검을 들고 여왕답게 위엄을 가진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고 그녀는 이케니 전사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소리는 속사기는 듯하기도 하고 노래하는 듯이 울려 퍼졌다.

“자유를 사랑하는 전사들이여 우리들의 적 로마의 브리텐 총독은 아득히 서방에 있다.”

“그들이 모나도를 함락하고 우리들에게 화살을 돌리기까지는 2, 3개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싸움에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오늘밤 로마인들에게 괴로움을 당해오던 백성들에게 사자를 보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힘을 합하여 오랜 동안의 어둠에서 깨어날 때이다. 로마인이 우리들에게서 약탈한 모든 것을 도로 찾고 보다 크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이다.”

부디카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케니의 전사들에게서 여러 가지의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로마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는 소리와 여왕에 대한 찬미의 소리가 끌어 올랐다.

이리하여 이케니족의 로마에 대한 반기가 일어난 것이다 AD61년 여름의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란군의 집결

그날 밤 부디카의 밀명을 받은 사자들은 엄중한 로마인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질풍처럼 어둠 속에서 각지로 분산되었다. 이리하여 비밀의 길, 묻힌 짐승의 길, 오랜 수로 등을 통하여 여왕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전언을 각 부족장에게 전했다.

이윽고 부디카의 부름에 호응하여 로마인에게 원한을 품은 여러 부족의 지도자들이 늪지의 비밀 장소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서로 적대시하는 부족도 섞여 있었으나 여왕의 비범하다고 할 수 있는 통솔력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각 부족 간의 근저에 깔려 있는 싫은 기억이나 미움마저도 그녀에게는 싸울 힘으로 변하여 간 것이었다.

그런 결과 이케니족의 반란에 남부의 토리노반테스(Trinobantes)족을 비롯하여 여러 부족이 더해졌다. 어떤 부족은 전차와 보병을 또 어떤 부족은 기병을 또 어떤 부족은 투석기와 활을 가지고 모은 병력을 신고하였다. 무기를 가지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틀린 정보를 흘림으로서 적을 교란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숲속 비밀 장소에서는 직공들이 은밀한 가운데 창이나 검, 전차 등 무기를 수리하고 비밀 장소에 저장해 두었다. 전술과 결행일 등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반복하여 논의하였다.

마침내 때가 왔다. 그날 밤 부디카는 희생할 검은 양을 잡고 그 피로 스스로의 이마와 뺨 그리고 입술에 그 피를 묻히고 전투 자세의 화장으로 고쳤다. 여성과 아직 어린 소년도 아버지의 창이나 검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그로부터 연일 집결이 계속되었다. 여왕 부디카의 이케니족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합쳐진 반란군은 그 규모가 수만의 대군이 되었다. 저녁이 될 무렵 수 백 개의 아궁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전사들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무기를 불에 달구어 날카롭게 하였다. 주위에는 수천의 헤아릴 수 없는 군마가 풀을 뜯고 있었다. 이케니성채는 거대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반란군의 행동 개시

3일째 새벽 피리소리를 신호로 이미 집결이 끝난 대군단은 대열을 갖추어 지금까지 로마군에게 약탈당한 영토를 도로 찾기 위하여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복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대군세는 일군의 전차 집단에 이끌리어 출발하였다. 선두에는 두드러지게 적색과 흑색의 가죽으로 덮인 전차 위에는 부디카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전사의 망토를 걸치고 금발의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을 받아서 빛나고 전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휘날리었다. 그 광경은 여왕벌을 따르는 성난 벌떼와 같았다.

반란군은 동부 잉글랜드에서 출발하여 남동으로 진로를 돌렸다. 최초의 목표는 남쪽의 콜체스타(Colchester)였다. 이 고을을 함락시키고 남쪽의 론디니움(Londinium)으로 향한다. 이것이 부디카의 생각이었다. 론디니움은 로마군의 대보급기지였다. 이곳만 함락하면 방대한 무기와 식량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가도에는 로마의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래 장비가 열악하고 늙은 병사들로 구성된 수비대라서 반란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다. 콜체스타에는 로마의 기병대와 수비대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브리타니아인의 결사적인 돌격으로 돌파되어 일체가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시가는 이르는 곳마다 불이 타고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시체가 즐비하였다.

저녁까지 거의 모든 시민은 죽고 살아남은 자는 시가의 중앙에 있는 대신전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신전은 2일은 버틸 수가 있었으나 마침내 돌파되어 난입한 브리타니인에게 유린되었다. 로마에 대한 원한과 미움과 복수심으로 미쳐버린 그들은 농성 중인 로마 병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였다. 신전 구석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으나 돌입해 들어갈 때 제 자식을 죽이고 모두가 자살하였다. 남은 아이들은 브리타니인에게 살해 되었다.

스스로 죽지 못한 여자들도 있었으나 그녀들은 모두 여왕에게로 데리고 갔다. 모두가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날 밤 모두 숲속으로 연행되어서 죽었다. 시체는 원형을 알 수 없을 때까지 방치하였다.

이윽고 로마의 제9군단 2천명의 병력이 구원하러 왔으나 브리텐인의 매복 작전으로 전멸하고 군단기는 빼앗겨 짓밟혔다.

 

로마 정규군과의 맞대결 작전과 패퇴

양군은 서로 움직이지 않고 약 2개월간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본토에서의 원군도 기대할 수가 없고 양식도 다한 로마군은 하는 수 없이 결전을 개시하였다.

이들 로마군 지휘관은 수에토니우수 바우리누수라는 장군이었는데 그는 통찰력이 뛰어난 명장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패배는 브리텐인과의 압도적인 차를 알고 있었으므로 전술적으로 뛰어난 전투대형을 가진 로마군에게 유리한 지형을 찾고 있었다. 그 장소는 론디니움에서 남서로 150킬로 떨어진 구릉지대로 남동으로 입을 벌린 좁은 협곡이 선택되었다.

이 협곡은 좌우로 무서운 숲이 둘러있었다. 바우리누수는 이 협곡의 깊은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열세인 로마군은 배후와 측면으로의 공격을 받지 않고 싸울 수가 있었다. 바우리누수는 이웃의 동맹군을 합쳐서 1만 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그에 대하여 부디카의 켈트연합군은 그야말로 로마군의 10배 이상의 대군이었다. 승리는 반란군에게 있다고 누구나 생각했다.

이때 부디카는 <우리의 적 로마는 스스로 주머니 속 든 쥐이다. 그들은 스스로 덫에 들어간 것이다.>하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운명의 신은 반란군의 편이 되어 줄 것인가?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가운데 결전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팔이 울리고 부디카의 검이 휘둘러지자 몇 백대의 켈트 전차대가 땅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돌격을 개시하였다. 먼지가 일고 대지가 흔들리며 주위는 대낮인데도 어두워졌다. 이때 이미 전차대의 선두는 로마군의 전선에 도달하고 있었다. 몇 초 후에는 적의 방어선을 뚫고 적진은 붕괴될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잘못되었었다. 전차대가 로마군의 전선을 돌파하려는 그 때 트럼벳 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방패가 출현한 것이었다. 그것은 로마의 장기인 밀집대형이란 것이었다. 3단으로 된 방패의 열리었다. 동시에 거대한 방패의 후방에서 수많은 화살이 모기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켈트인이 조종하는 전차에 쏟아진 것이다. 전차대의 선두는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붕괴되었다. 마치 사람과 말이 대지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켈트 전차대를 가능한 한 끌어당기어 정확히 맹렬한 창을 비 오듯 쏟아낸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전차대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중에는 미친 듯이 달아나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뒤따르는 전차와 부딪쳐 대혼란이 일어났다. 수십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마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빼들고 백병전으로 돌격했다. 완전한 질서 속에서 급속히 일어났다. 동시에 양 날개의 기병과 보병이 창을 들고 공격했다. 그것은 로마 전군이 쐐기 모양이 되어서 켈트인의 대집단에 구멍을 뚫은 것 같았다.

전투가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황은 일변하고 말았다. 10만 대병력이었던 브리텐군은 모두 붕괴하고 헝겊이 찢기듯이 찢기고 말았다. 브리텐인들은 압도적인 승리의 광경을 구경시키려고 아이들을 태운 포장마차를 다수 군단 후미에 달고 있었으나 그것이 스스로의 퇴로를 막는 결과가 되었다. 달고 온 마차가 그들의 목을 죄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좁은 협곡에 덮개라고 덮은 듯이 패주하는 브리텐인들은 여기서 움직이지 못하고 참살 당하였다. 예상과는 다르게 덫에 걸리어 주머니 속의 쥐가 된 것은 켈트족이었다. 기록에는 8만 명 이상의 켈트인이 죽었다고 한다.

부디카의 두 딸도 이때에 죽었다. 큰 딸은 죽은 자의 검을 들고 싸웠으나 로마군에게 찔려 죽었다. 둘째 딸은 넘어진 포장마차에 깔려 죽었다.

 

부디카의 최후와 후대의 평가

부디카는 부상당하였으나 우군의 도움으로 전장을 이탈하였다. 그 후 전투에서 패하고 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여러 날을 걸려서 고향인 이케네성에 도착한 때 거기에는 나이든 그녀의 유모가 따뜻이 불을 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 돌아올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하는 소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제야 이케니성의 모든 것이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생각하면 3개월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었다.

이윽고 유모가 물을 가득 채운 잔을 들고 왔다. 그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잔은 일찍이 왕 푸리수다구스가 결혼식에 부디카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준 것이었다. 그녀는 잔에 담긴 하얗고 탁한 액체에 눈길을 돌리고 또 성채의 곁에 핀 이름 없는 한 송이의 꽃을 보았다. 마침 저녁노을이 황야에 잠기려는 그 때 고요히 잔을 들고 한 숨에 들이마셨다. 그리고 수 개 월 전에 죽은 남편 푸리수다구스의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부디카의 로마에 대한 도전은 끝이 났다. 그것은 여름에 일어난 폭풍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폭풍은 민족의 존엄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짧고 허무하였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때 그녀가 잘 훈련된 로마의 정규군과의 정면도전을 피하여 지구전으로 게릴라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명장 바우리누스라 해도 물자는 결핍되어 로마군은 브리텐군에게 전멸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영국의 역사는 현대와는 매우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카가 살았던 놀포크에는 2천년이 지난 오늘도 당시를 생각하게 하는 풍토가 남아있다. 여왕 부디카는 고대 켈트어로 <승리>(빅토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고대 켈트의 위대한 여왕의 피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어져서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현재 런던 대시계탑이 보이는 테임스강가에 그녀의 조각상이 서있다. 그 모습은 첫째 딸 에스일트와 둘째 딸 넷산 두 딸을 거느리고 숙적 로마를 내쫓으려고 전차에 올라타서 켈트전사를 격려하는 듯하다.

17세기에 그녀의 자손들은 대영제국의 황금시대를 출현시키고 그녀와 같이 승리를 의미하는 빅토리아여왕 치하에 세계의 바다를 주름 잡았는데 그것은 마치 여왕 부디카의 불요불굴의 혼이 시간을 넘어서 갈아탄 것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