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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영혼의 향수

간천(澗泉) naganchun 2021. 4. 4. 18:33

영혼의 향수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매우 몸이 허약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들어보면 돌이 되기 전에는 경기(경끼)를 자주 일으켜서 오케물통(=나무 물통)에 담그기도 하였다 한다. 돌이 지나서야 겨우 건강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어려서 감기라도 들면 어머니는 심방(무당)을 불러서 빌곤 하셨다. 그러는 것이 매우 싫어서 나는 심술로 부화시키려는 알을 품은 닭의 둥지를 흔들어버리곤 하기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아버지는 병을 앓아서 오사카에서 귀향하셨다. 당신이 건강하시지 않으니까 매일 쌀 한 사발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경을 읽으셨다. “불설명당신주경 안토지신명당경 여시아문일시불(佛說明堂神呪經 安土地神明堂經 如是我聞一時佛그러나 그 기도가 영험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별로 건강이 나아지지는 않으셨다. 이런 일들이 내가 어렸을 때의 종교적인 행사와의 만남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1951년 중학교 3학년 때이다.

당시 6·25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제주도로 이주하여 천막 교회가 무수히 생겨나던 때이다. 지금은 기상청제주측후소가 있지만,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신사가 있던 자리에 천막을 치고 교인들이 모였었다. 어느 날 일요일 밤에 나는 이곳을 찾았다.

그 교회는 감리교회로서 그때 설교를 하신 분은 고학환(高學煥) 전도사였다.

지금 주제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으나 인간의 종교심은 영혼의 향수다.”라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교회를 자주 찾게 되었으나 계속하지는 못하였다.

우연히 나는 20대 초 1955년도에 두 번째로 기독교와 회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개척지를 찾아다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한 전도사를 만나서 우리 고장에 교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마을 이장의 호의로 마을 공회당을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쓰게 되었고 청소년들이 많이 출석하였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시골에 교회의 종이 울리고 찬송가가 들리어 계몽과 교화의 움직임이 생동하게 되었다. 나는 세례를 받고 집사로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이 신심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고 나 자신도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에는 멀리 고향을 떠나 직장을 전전하는 과정에 교회활동은 침체되어 결국에는 7년 정도를 견디지 못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젊은 청소년들에게 신심이 깊어지지 않은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기독교는 우상을 섬기지 않으니 자연 고례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된다는 계율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옛날 농경 문화시대에는 집성촌을 이루고 유교에서 유래하는 제례를 통하여 조상신을 숭상하는 종교처럼 대하고 생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조상을 숭상하며 온 친족이 모여 제사를 올리던 시대에는 반드시 제례의 고례를 잘 따라야 하였다. 제례를 통하여 예의범절을 익히고 친족의 유대를 굳건히 하며 가족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가족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어서 제사를 모실 때 반드시 제관으로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세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삼헌이 될 제관인 자손이 모여지지 않은 경우가 흔해졌다.

공자님은 제사는 귀신이 있는 것처럼 하고, 내가 참사하지 못하면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과 같다.”(祭神如神在,吾不與祭如不祭)(팔일)고 말하였다.

한편 과연 조상신을 잘 모시고 섬기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반드시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다섯 살 때부터 초헌관 제주가 되어서 60여 년을 제사를 모셔왔다. 종가가 부산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윗대 조상에 대한 제사에는 참사하지 못하여서 50여 년이 된다. 그러고서도 자손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비난을 받아도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불효막심한 자손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님의 영혼이 깨어나신다 하여도 이 시대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다고 수긍하시리라. 전래의 조상숭배의 깊은 관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였다.

그러나 한때 아들, 딸들이 독립하기 전에는 적어도 삼헌을 갖추어 제사를 모실 수가 있었고 특히 50대가 되면서는 어머니가 일부러 지어주신 도포를 입고 제사를 모시곤 하였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제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가례초해(家禮抄解)?를 바탕으로 현대에 맞도록 문중의 안을 만들어 ?가례전범?이라는 작은 책을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여 우리 집안 만의 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었다.

지금은 서울. 일본으로 자식들이 흩어져 있으니 그들이 참사할 수가 없다. 기어이 참사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신종추원(愼終追遠)에서 유래하는 제사의 근본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환경과 시대가 바뀌었다. 조상을 추원하는 방법이 반드시 유교식이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참으로 인간의 종교심은 영혼의 향수이다.”라고 생각할 때 참으로 믿고 섬겨야 할 종교는 기독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 자신 30대에 고향을 떠나고 직장을 옮기고 일본으로 서울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 나이가 더 많아지면서 구원에 대한 갈구심이 또다시 교회를 찾게 하였다.

세 번째 기독교와 만나서 어느 한쪽을 택할 것인가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 유교적 관념에서 탈출하여 사랑의 종교 기독교에 귀의 안착하게 되었다. 영혼의 향수를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성경에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 ; 7)라 하였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의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브리서 11 ; 13~16)

이제 나그네 신세인 이 땅에서 영혼의 본향을 찾아가려는 마음의 발동이라 생각한다.

 

이로써 전지전능하여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신(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깨닫게 이끌어주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온 누리가 잠자는 고요한 시간 또는 새벽에 명상하면 성령이 나타나리라 믿는다. 예배당에 가면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성경에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하였고 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가니 전서 5 ; 16~18)라 하였으니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좇으면 반드시 구원이 내게 이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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