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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아! 1948년의 쓰라린 추억

간천(澗泉) naganchun 2021. 7. 17. 05:51

 

오늘은 1948년 대한미국의 건국의 기초를 만든 제헌 국회가 열리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제헌절 기념일이다.

마침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5 10선거)와 관련된 추억의 일단을 적어보려한다.

 

 

아! 1948년의 쓰라린 추억

 

 

지개를 진 소년 :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픈 '기억' 

 

   1945년 해방이 되어 국내는 어지러웠으나 우리 집에서는 1946년에 들어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었다. 1943년에 병으로 오사카에서 귀국하신 아버지의 건강이 매우 좋아지셔서 집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몸소 하시고 특히나 1947년 가을에는 한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촐 베는 일)을 준비하는 일도 아버지가 앞장서서 긴 낫을 벼리고 일꾼을 빌어서 몸소 나가시곤 하셨다. 아버지가 힘든 일도 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바야흐로 우리 집에 희망적인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1948년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였다. 마침 4월초에 제주농업학교에서 과학전람회가 열렸다. 학교에서는 7월에 졸업하게 되는 6학년 학생에게 임의로 과학전람회를 견학하도록 하였다. 우리들 한동리 학생 5명은 41일 그 전람회를 견학하기 위하여 걸어서 80 (32Km) 거리인 제주읍까지 갔다. 그때 나는 관덕정 앞에서 남문통으로 50쯤 올라가서 우측에 위치한 외할머니가 경영하시는 애중식당에 머물고 일행이었던 고원효는 그의 백부님이 경영하시는 애중식당에서 가까운중앙여관에 머물렀다. 다른 아이들은 제각기 친척집에서 머물렀다.

42일 아침에 관덕정 앞에 모두가 모여서 지금의 전농로 일대에 있던 제주농업학교 전시장에 가서 전람회를 견학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박제된 원숭이와 호랑이 등 여러 가지 동물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43일 아침에 여러 친구들과 동문 다리에서 만나 한동까지 걸어서 출발하였다. 출발하여 화북 별도천 다리에 이르자 검문하던 경찰이 막아서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간밤에 사건이 일어나서 너희들은 걸어서 갈 수가 없으니 동문파출소에 가서 대책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동문파출소에 되돌아가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졸랐다. 파출소에서는 전람회를 견학하고 가는 학생들이니 보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 기다리라고 했다. 마침 성산포까지 가는 트럭이 있어서 우리는 그 트럭에 태워주어서 귀가하게 되었다. 트럭을 타고 삼양지서 앞에서 차를 멈추고 검문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다. 간밤에 폭도들이 습격하여 지서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1948434 · 3사건의 발단이었다.

제주 4 ·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167)에 따르면 “19484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12개지서 중에 삼양지서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사건의 피해는 우리 마을에도 미쳤다.

한동리지둔지오름(1997. 122)에 따르면 대부분의 해변 마을 주민들이5 · 10선거에 반대해 입산했던 것과는 달리 한동리의 경우는 별 탈 없이 5 · 10선거가 치러졌다. 이에 따라 한동리는 곧 우익 마을로 지목돼 무장대의 표적이 되었다. 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1948511일 무장대는 구좌면사무소(평리 소재)를 공격했다. 무장대는 당시 평대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불태운데 이어 한동리를 습격하였다. 무장대는 상동 동쪽에 위치한 방축동으로 들어오면서 우선 고승호(高承昊) 이장 집을 불태웠다. 고승호 이장은 급히 피신해 무사했다. 무장대는 이어 상동 말 방앗간에서 보초를 서던 이두평(李斗平)을 찾아내어 살해했다. 또 골목에 나와 있던 고귀부(高貴富)를 잡아 한동리 지경 맹이동산 부근까지 끌고 가다가 살해했다.”

 

이때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불타는 불꽃으로 하늘이 환하게 보였는데 이것은 평대리 소재 면사무소가 불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남쪽 방축동에 불타는 불꽃으로 하늘이 환하게 퍼지는 것을 보며 무서워서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튿날 난리가 났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알았다. 게다가 고귀부(高貴富) 씨는 나의 친구 고원효(高元孝)의 아버지이시다. 어려서 내가 본 소견으로는 매우 억새고 튼튼한 몸매를 지닌 분이셨다고 기억한다. 듣기로는 일당백의 몸매를 지녔기 때문에 끌고 가다가 반항하면 창으로 찌르곤 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버리고 간 것이라 했다. 온몸이 창에 찔려서 피투성이가 된 시체로 처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유엔한국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하게 되었다. 반대세력이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군정이 주관하여 국가건설을 위하여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510일에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좌익 세력이 주축이 된 반대세력은5 · 10 선거를 거부하고 제주에서는4 · 3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단독선거 반대 진영의 극렬한 반대 속에 치러진 그 5 · 10 선거에 제주도 북군 갑구에서 김녕리 출신인 양귀진(梁貴珍)이라는 분이 입후보했었는데 그는 아버지하고는 오사카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지기였다. 그 분이 우리 집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키가 크셔서 육척장신이셨는데 그는 아버지의 어깨 높이의 작은 키에 몸이 뚱뚱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그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선거운동을 하셨는데 투표결과 최고득표를 하였으나 전체투표율이 43%밖에 되지 않아서 선거법 제44조에 의하여 당선은 무효가 되었다.(제주 4 · 3사건 진상보고서p211 , 진성범 저 제주 반세기p48) 이로 인하여 무장대의 공격대상이 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물론 나의 가족들은 밤이 되면 집 앞의 논밭을 건너서 보리밭으로 숨으러 다녀야 했다. 게다가 백부님은 민보단장이라서 저녁이 되면 피해야 하는 몸이 되어서 집안이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가운데 아버지의 병세는 급히 악화되어 마침내 1116(음력1016)에 운명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이 허전하고 참으로 무섭고 몸서리치게 하는 겨울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우리 동네에는 덕천리에서 소개된 일가족이 있었는데 우리 누나하고 동년배인 처녀가 있어서 누나하고 친히 지내던 기억이 있고, 계룡동에는 무드네(제주시 용강동) 고씨라 불리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후 며칠간 남쪽 둔지봉 너머에서 송당리 100여 호의 집이 불타는 연기와 함께 불타오르는 불빛이 비친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군정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강경방침을 시행한 것이다.

“1948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과 1117일 계엄령선포 등을 통해 강경작전의 준비작업을 완료한 진압군은 소개된 중 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등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제주 4.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p286)

그리고 한 겨울이 되자 성담을 쌓아서 마을을 두르는 성담 축조 공사가 행해졌고, 한동리 서쪽으로 행원리를 거쳐서 월정리까지 사이에 1930년대 초에 심었다는 20년 가까이 자라서 울창한 사방림의 소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일주도로 좌우 각 100여 미터 안의 나무를 베는 일이므로 그 양은 엄청났다. 호당 한 명의 남자가 차출되었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였지만 공역 장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네 목수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몸에 맞는 지개를 만들고 난생 처음으로 추운 한겨울 내내 지개를 지고 어깨에는 지개멜빵 자국이 생기고 등에는 멍이 들 정도로 돌이나 나무를 운반해야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쓰라린 체험을 한 셈이었다.

한편 동네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는 바람에 나무가 흔해져서 1948년 겨울에는 숯을 굽는 일이 유행처럼 번져서 나도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숯을 구워서 겨울에 때기도 하였었다.

그나마 마음과 몸은 춥고 떨리는 나날이었지만 숯불이라도 쪼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그 후로 사건은 험악하게 전개되었으니, 피아를 구분할 수 없어 낮에는 군과 경찰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밤이면 산에서 내려오는 무장대를 두려워하며 숨어살아야 하는 세상이 연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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