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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의 고전/장자 이야기 백 가지

제81화. 우물 안 개구리(외편 추수)

간천(澗泉) naganchun 2010. 8. 9. 04:28

 

제81화. 우물 안 개구리(외편 추수)

 

 

 

  송나라 장자가 능변가라는 평판이 높아 널리 알려지자, 혜자(惠子=惠施)와 같은 명가(名家)의 한 사람인 공손룡(公孫龍)이 장자를 찾아갔다. 둘이서 논의를 하는 가운데 공손룡은 장자의 학문이 넓고 끝이 없음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魏)나라 공자 모(牟)를 찾아갔다. 공자 모(牟)는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4편의 글을 실은 도가사상가로서 장자보다 약간 나이가 위인 듯하며 장자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다.

  공손룡은 공자 모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의 도를 배웠고, 장성한 뒤로는 인의의 도에 밝아 동이(同異)를 일치시켜 말하고, 견백(堅白)을 분리시켰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 하고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하여 많은 사람의 지혜를 괴롭히고,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을 굴복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스스로 몹시 통달했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장자의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이상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나의 이론이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인지, 나의 지혜가 그만 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장자의 도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공자 모는 책상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러 한바탕 크게 웃고는 말하였다.

“그대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어느 날 개구라가 동해에 있는 자라에게로 가서 ‘나는 즐겁다. 나는 우물 난간 위에까지 뛰어오르기도 하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는 깨진 벽돌 가에서 쉬기도 하며, 물속에서는 양쪽 겨드랑이로 수면에 떠서 턱을 물 위로 내밀기도 하고, 진흙을 차면 발이 파묻혀 발등까지 흙에 파묻히기도 한다. 저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 따위가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한 우물의 물을 독차지해서 내 멋대로 노는 즐거움이 지극한데, 그대는 왜 때때로 와서 내가 노는 것을 구경하지 않는가?’ 했다.”(외편 추수)

  공자 모가 하는 말은 너 같은 자그만 사람이 저 위대한 장자를 생각하는 것은 마치 부서져 가는 우물 난간에 있는 개구리가 큰 동해에서 헤엄치고 있는 커다란 자라를 향하여 자기 자랑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스스로 우물 속에서 뛰어 놀면서 곁에 있는 게나 올챙이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손룡은 마치 자기의 학문만이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자의 학문과는 비교할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다음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동해의 자라는 그 우물로 와서 우물로 들어가려하는데 왼쪽 다리가 채 들어가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우물에 걸려버렸다. 이에 엉금엉금 기어 나와 개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대체로 천리라는 먼 거리를 가지고서도 바다의 넓이를 잴 수가 없고, 천 길이라는 높이를 가지고서도 바다의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우임금 때에는 10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어도 바다의 부피가 조금도 늘지 않았고, 탕임금 때에는 8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어도, 이로 인하여 분량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대체로 시간의 길고 짧은 것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고, 물이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늘고 줄지 않는 것, 이것이 역시 동해의 즐거움이다.’고 말했다.” 이에 우물 안의 개구리는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외편 추수)

  “또한 대체로 시비의 경계도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장자의 말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은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라는 것과 같고, 노래기를 보고 황하를 건너가라는 것과 같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일이다.

  그 지혜가 지극히 오묘한 말을 알지도 못하면서 궤변으로 한때의 명리에 만족하고 있는 자는 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지 않은가. 또 저 장자의 말은 아래로는 황천에 이르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르러 남쪽도 없고 북쪽도 없이 환하게 사방으로 통달해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데에까지 잠기어 있으며, 또 거기에는 동쪽도 없고 서쪽도 없이 아득히 우주의 근본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대도에 귀일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대는 아주 작은 지혜와 보잘것없는 관찰로써 그것을 구하고 엉터리 같은 변론을 가지고 그것을 찾고 있다. 이는 곧 가느다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 송곳으로 땅을 찌르는 것과 같으니 이는 또한 좁은 소견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돌아가라.”(외편 추수)

   우리 동해는 옛날 우임금 시대에 10년간 홍수가 났으나, 그 때문에 조금도 물은 불지 않았다. 또 은나라 탕임금 시대에는 8년간 가물었으나, 그 때문에 조금도 물이 줄지 않았다. 그것은 동해가 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이 개구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작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공손룡이 장자의 말에 놀란 것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동해의 자라의 말을 듣고 놀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말하기를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 송곳으로 땅을 찌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저 장자의 위대함을 저울질하려는 것은 마치 가느다란 대롱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끝이 작은 송곳으로 땅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이다.

  도가의 한 사람인 공자 모의 입을 빌어서 장자의 사상은 상식을 벗어난 기상천외한 것으로 현묘 불가사의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견이 좁다는 뜻으로 쓰이는 ‘우물 안 개구리’ 곧 정중지와(井中之蛙)란 말이나, 끝이 작은 송곳으로 찌른다는 뜻으로, 식견이 좁거나 좁은 식견으로 큰 도리를 관찰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추지(錐指)라는 말과 대롱 구멍으로 사물을 본다는 뜻으로, 좁은 소견이나 자기의 소견을 겸손하게 이르는 관견(管見)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