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자취를 깎고, 세를 버려라(외편 산목)
노장류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공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는 뚜렷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에서 포위당하여 칠일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거기에 대공임(大公任)이라는 사나이가 문병하러 갔다. “선생도 이번에는 죽을 것 같구려.” 하고 말하니 “그렇다.” 하고 대답한다. 대공임은 “그러면 내가 죽지 않는 도를 가르쳐드리겠다.” 하고 공자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동해에 새가 있는데 이름을 의태(意怠)라 했소. 그 새는 몹시 느리고 잘 날지를 못하였으므로 무능한 것 같이 보였소. 그러나 이 새가 날 때에는 앞에 서지 않고, 물러날 때에는 뒤에 쳐지지 않으며, 먹이를 먹을 때에는 남보다 앞서 먹지 아니하고 반드시 남이 먹은 뒤에 먹었소. 이리하여 그 새는 행렬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해를 당하지도 않았소. 그런 까닭에 자연 환난을 면할 수가 있었소.”
하늘을 나는 새이면서도 잘 날지를 못하듯이 쓸모가 없는듯하면서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 지내면 무용의 용의 효과로서 환난을 면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곧은 나무는 먼저 베어지고, 물맛이 좋은 우물은 먼저 말라버리는 것이오.” 인생도 그와 같아서 쓸모 있는 인간은 무엇인가가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당신을 생각해보니, 당신은 자기의 지식을 남에게 주면서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몸을 닦아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며, 밝게 해와 달을 내걸고 가듯이 자신을 나타내려 하고 있소. 그래서 재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라고 깨우친다.
그리고 말을 이어서 훈계하기를 “스스로 자기의 공을 자랑하는 사람은 도리어 공이 없고, 공을 이루고도 물러가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며, 이름을 떨치고도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지러워진다.” 고 말한다.
이제부터는 일체 그런 공명심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자취를 깎고, 세를 버려라.” 곧 자신이 한 일을 숨겨 자랑하려 하지 말 것이며, 권세를 떨쳐서 그것을 공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첫째의 주의할 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이들 노장의 가르침에 의하여 점점 변해 가는 것처럼, 다음의 이야기를 한다.
노장류의 사람으로 맹손재(孟孫才)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슬퍼할 줄 모르는 그가 노나라에서는 평판이 좋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맹손씨는 우리들보다 일보 나아간 사람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생각해 보라. 만일 네가 꿈에 새가 되었다면 하늘을 향하여 날아 갈 것이다. 꿈에 고기가 되었다면 연못에 잠길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죽는다면, 또 죽음 앞에 별세계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슬퍼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결국 맹손씨는 그 점을 체득한 듯하다.”라고 깊이 감동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결코 삶과 죽음의 걱정에 구애받을 것 같은 범부는 아니다. “삶과 죽음은 천명에 있고, 부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고 또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고도 말한다. 광인(匡人)이 습격해올 때에도, 또는 사마환퇴(司馬桓魋)가 난동을 피울 때에도 공자는 태연히 “하늘이 덕을 나에게 내리셨는데, 광인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환퇴가 나를 어쩌겠는가?” 하고 천명을 믿고 있었다. 장자가 자기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공자를 마치 삶과 죽음에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장자의 나쁜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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