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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31,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이야기(2)

간천(澗泉) naganchun 2025. 2. 26. 03:51

31,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이야기(2)

== 「케플러의 법칙」 발견으로 천문학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4, 교육

 

학교 교육으로서는 라틴어학교(유럽의 일반적인 중등교육) 다음에 프로테스탄트계의 신학교 (Evangelische Seminare Maulbronn und Blaubeuren)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받아서 학교에 다녔다. 1587년에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튀빙겐(Tübingen)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비투스 뮐러(Vitus Müller)와 함께 철학을, 야콥 히어브란트(Jacob Heerbrand)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케플러는 또한 이 전문과정에서 접한 신플라톤주의에 기울어졌다(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케플러의 후기 저작에 대한 설명에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동 대학의 교양 과정에서 미하엘 메스트린(Michael Maestlin,1550-1631, 독일의 천문학자)이 진행한 천문학 강의를 접하게 되었고, 이에 흥미를 느꼈다. 그 과정에서 행성의 운행과 관련하여 프톨레마이오스(AD 83-168년경, 또는 프톨레미(Ptolemy)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의 우주 체계(우주에 대한 설명)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모두 배우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에 눈을 뜨고 깊이 매료되었다. 또한, 케플러는 동 대학에서 수학도 공부하였다.

 

케플러는 수학 성적이 우수했으며, 학생 동료들을 위해 점성술 차트를 만들어 주는 등 천문학적 기술에서도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년 무렵, 케플러는 원래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에게 추천되고 제안된 직업은 목사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그라츠의 학교에서 수학 및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직이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리고 1594년에 동 대학을 졸업하였다.(위키페디아)

 

 

5, 천문학 교사 취임과 『우주의 신비』 출판

 

1594년 졸업 후, 그는 그라츠의 한 학교(현재의 그라츠 대학교)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596년에 그는 우주의 신비(The Mysteries of the Universe)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고 6 개의 행성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5개의 정다면체로 배열되어 있으며 외접선과 내접선상이 연속적으로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하면 거리가 유지된다. 또한 이 책에서 케플러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주창한 태양중심설(heliocentric theory, heliocentric theory)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한 최초의 천문학자였고, 그것을 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케플러에게 그의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1598년에 그라츠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그라츠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와 교사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케플러는 직장을 잃었다.(위키페디아)(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