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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30, 요하네스 구텐베르그(1398— 1468) 이야기(6)

간천(澗泉) naganchun 2025. 2. 24. 02:58

30, 요하네스 구텐베르그(1398— 1468) 이야기(6)

==활판인쇄술을 발명하여 현대인쇄법의 기초를 구축했다.==

 

 

10, 구텐베르크의 성서

 

구텐베르그가 1455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불가타 성서[(불가타/vulgata)라는 말은 <대중(라텐어)>이라는 의미로 라텐어 에디토 불가타(editio vulgata에서 유래한다.)]이다.

한편 42행씩 인쇄되어서 <42행성서>라고도 불린다. 서양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책이므로 가격은 매우 고가이다. 기존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49로 독일(13), 미국(11), 영국(8) 프랑스(4)러시아(2)스페인(2) 바티칸(2) 오스트리아(1) 벨기에(1) 덴마크(1) 일본(1) 폴란드(1) 포르트가르(1) 스위스(1)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11,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 금속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 한국에서 인쇄되었지만,(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1377(고려 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 '한국에서는 유럽과 같은 인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위키페디아)

 

한국의 금속 활자 인쇄는 주로 조선 왕조의 왕실 주조소에서 발전했다. 왕실은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 독점권을 가졌으며, 왕명에 따라 비공식적인 인쇄 활동과 인쇄의 상업화 시도를 억제했다. 따라서 초기 한국의 인쇄는 강한 계급 사회의 일부인 소수 귀족 계층만을 위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고려의 금속 활자술이 세계 최고였으나, 소수의 지배층만이 인쇄술과 같은 첨단 기술을 독점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유럽의 출판 혁명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언급될 내용처럼, 동양에서 출판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동서양의 문자 차이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서양에서 활자를 통해 표현해야 할 요소는 대소문자 알파벳, 약간의 구두점과 조정 문자, 숫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의 전통 문자 체계인 한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만 자의 한자 활자가 필요했다. 개인이 이러한 방대한 양의 활자를 제작하고 보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국가가 직접 나서야만 이를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