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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의 고전/장자 이야기 백 가지

제14화. 도는 만물의 근원(외편 전자방)

간천(澗泉) naganchun 2009. 7. 25. 05:10

 

제14화. 도는 만물의 근원(외편 전자방)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갔더니 노자는 막 감고 나온 머리카락을 말리느라고 양지바른 쪽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머리카락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혼을 어디에 두고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공자는 옆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가 노자가 살며시 눈을 뜨자 말하였다.

“선생님. 제 눈이 어지러웠는지 참으로 그러한지 모르지만, 아까 선생님의 몸은 마치 마른 나무와 같았고, 만물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서 홀로 독립의 경지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노자가 대답해 말하였다.

“나는 만물이 생기기 이전 곧 도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고 있었소.”

  공자가 “도의 경지에서 노닌다함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묻자 이에 노자가 말하였다.

“참된 도는 이를 마음에서 찾아도 고생만 할 뿐 알 수가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시험 삼아 당신에게 그 대강을 말해보겠소. 대체로 지극한 음기(陰氣)는 고요하고 차며, 지극한 양기(陽氣)는 밝고 더운 것이오. 고요하고 찬 음기는 땅에서 나오고, 밝고 더운 양기는 하늘에서 생기는 것이오. 이 두 가지의 기가 섞이고 서로 왕래하여 화합하면 거기서 만물이 생기는 것이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인가가 있어서 주관하는듯하지만 그 모습은 눈으로 볼 수가 없소. 천지의 사계절에는 소멸과 소생이 있고, 만물에는 무성함과 공허함이 있으며, 어둠과 밝음이 있으며, 해와 달의 교체가 있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되지만, 그 조화의 공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오. 만물의 발생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싹트고 그 종말은 다 흩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오. 이리하여 사물의 시작과 끝이 한없이 되풀이되어 다하는 일이 없는 것이오. 이러한 도를 제외하고 달리 무엇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있겠소.”

“그러한 경지에서 노닐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공자가 물었다.

  노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그 경지에 이르면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되오. 이와 같이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경지에서 노는 사람을 지인(至人)이라 하는 것이오.”

“원컨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공자가 간청하자 노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풀을 먹는 짐승은 제가 사는 숲이 바뀌는 것을 꺼리지 않고, 물속에 사는 벌레는 그가 있던 못이 바뀌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오. 이것은 사는 곳이 바뀌어도 살아나갈 수 있는 먹이는 변함이 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비록 이처럼 자그만 변화가 있어도 떳떳한 도를 잃지 않는다면, 기쁨이나 노여움, 슬픔이나 즐거움이 가슴속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천지 만물은 원래 하나의 도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이에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지나 몸의 각 부분은 티끌처럼 여겨지게 되고, 죽음과 삶이나 끝과 시작은 낮과 밤이 바뀌듯이 느껴지게 되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이오. 하물며 이득이나 손해, 불행이나 행복 따위야 미칠 수가 있겠소? 예를 들면 사람들이 노예를 진흙 버리듯이 버리는 자는 자기 몸이 노예보다 값지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 가장 값진 도야말로 내안에 있으며 어떤 외부의 변화에도 잃지 않는 것이오. 또 만물의 변화는 먼 옛날부터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오. 그러니 대체로 무엇이 마음을 괴롭힐 수 있겠소? 다만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는 이 도를 터득한 사람만이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 제자인 안회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까지 대해온 도란 것은 마치 항아리 속의 벌레와 같은 것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그 항아리 뚜껑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천지의 위대한 참모습을 알지 못할 뻔하였다.”(외편 전자방) 하고 비로소 마음의 창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