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는 일본에 은혜를 베풀었다.
Ⅰ. 우리 조상이 일본에 건너간 물결
고대로부터 우리 조상은 1910년 이후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네 차례의 큰 물결을 이루어 일본에 건너가서 갈 때마다 일본문화를 더 풍요롭고 화려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공헌했다.
일본 사학자 우에타 마사아키(上田正昭)는 ≪고대 일본과 도래인≫이라는 저서에서 우리 조상이 일본에 다수 건너간 물결은 다음과 같이 네 차례 있었다 하고 있다.
첫째는 BC 3-2세기 일본의 야요이(弥生) 시대 전기이며, (고조선시대)
둘째는 AD 5세기 전후 일본의 고분시대 중기의 전반에서 후반까지이며,(삼국시대 중기)
셋째는 AD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까지이며,(삼국시대 중기)
넷째는 AD 7세기 중엽이다.(통일신라시대)
Ⅱ. 고대의 한 ․ 일 관계
고조선이 위만(衛滿)의 침략을 받자, 준왕(準王)이 남쪽으로 망명하여 이동할 때에 준왕(準王)을 따르는 일부는 삼한(馬韓, 辰韓, 弁韓)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였고 또 일부는 뛰어난 철제 무기와 농구 등을 가지고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 건너가서 일본 사상 야요이(弥生) 문화를 일으켰다.
변한(현재 경상남도 서남부)은 당시 다량의 철이 산출되어 이웃 부족은 물론 일본과도 무역이 성행했다. 특히 변한 12국 중에도 구야국(狗倻國) 곧 현재 김해 지방은 낙동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본과 낙랑(樂浪)과의 무역선의 기항지였고 무역의 중개지였다.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는 그의 저서 ≪일본의 역사≫에서 고대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가서 문화를 일으킨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력기원전 3-2세기경 남조선에서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안 지대에 승문(縄文)토기와는 계통이 다른 그보다도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를 가지고 논농사와 금속기를 쓰는 문화가 전해졌다. 이것을 야요이식(弥生式) 토기문화(야요이文化)라 한다.
야요이 문화는 일세기 정도 사이에 산닝〔山陰=현재 쿄토(京都)와 쥬고쿠(中国)지방 북쪽 지방〕, 상요[(山陽=현재 세토(瀬戸) 내해 연안 지방)]를 거쳐서 깅키(近畿)지방까지 퍼지고, 거기서 이세(伊勢) 연안으로 퍼져, 기원 후 일세기 후반에는 간토(関東) 지방까지 보급되어 기원 후 3세기에는 한층 높은 문화의 단계인 고고학상의 고분시대 전기로 이행한다.
Ⅲ. 삼국 시대의 한 ․ 일 관계
우리나라의 역사상 삼국 시대라 하면 서력기원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이다. 삼국이 고대 국가로서 체제를 갖춘 시기는 백제가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때이고, 신라가 17대 내물왕(奈勿王356-402) 때이며, 고구려가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때이다.
고구려는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 413―491) 때에 그 세력이 강해져서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고구려의 남하에 압박 받은 백제, 신라에서 그리고 7세기의 중엽 경에 고구려, 백제의 멸망으로 인하여 그 유민들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뛰어난 선진 문화를 가지고 그것을 활용하여 일본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 문자와 학문의 전수
1) 문자사용의 개시에 공헌
백제 13대 근초고왕 때 아직기(阿直岐=古事記에는 阿直吉師)가 사절로 건너가서 일왕 응신왕(應神王)의 태자 우지노와카이랏코에게 천자문과 유교를 가르쳤다. 후에 일본 응신왕의 요청에 따라 아직기가 왕인(王仁=古事記에는 和邇吉師)을 추천하므로, 백제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375-384) 때에 왕인이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서 태자를 가르쳤다. 이로써 일본에 문자를 사용하는 효시가 되고 또 유학(儒學)이라는 학문의 시작에 공헌하였다.
2) 일본의 한자 사용, 셈묘가키(宣命書)와 가나(假名)에의 영향
일찍이 백제와 신라에서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당시의 말을 적고 있었다. 이것을 이두(吏讀―鄕札)라 하는데, 이 이두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셈묘가키(宣命書)가 되었다. 이제 일본의 셈묘가키와 신라의 향가에 나오는 이두를 비교해 본다.
ㅇ일본의 셈묘가키―也麻, 有米能波奈라 적고, 읽기는 ‘야마, 우메노하나’라 읽으며, 그 뜻은 ‘산의 매화꽃’을 의미했다.
ㅇ신라 향가―東京 明期月朗,夜入伊 遊行如可라 적고, 읽기는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라 읽으며, 그 뜻은 ‘서울(현 경주) 밝은 달에 밤늦도록 놀다가’를 의미했다.
일본 사학자인 이노우에(井上秀雄)는 그의 저서 ≪일본과 조선의 2천년≫에서 이처럼 한자의 모양을 빌려서 제각기 자기의 국어를 적는 방법이 조선에서 전해왔는데, 조선에서는 이두식 한문으로, 일본에서는 셈묘가키로 발전해 간다.”고 했다.
또 한문을 읽을 때, 문중(文中)에 들어가야 할 조사를 한자를 빌어서 고유한 말로 읽을 수 있게 하는 토(吐)라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天地之間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하니”라고 읽을 때, ‘에’는 ‘厓’의 민엄호 ⺁부분을 쓰고, ‘이’는 ‘伊’의 ⺅변만을 쓰고, ‘하니’는 ‘爲尼’에서 ‘爲’의 손톱 조⺥ 부만을 쓰고 ‘尼’의 주검 시 ⼫부분만을 썼다. 이를 ‘토’라고 하는데, 이 ‘토’가 일본의 가나문자에 영향을 주었다.
앞에 든 이노우에(井上) 교수는 더욱이 한자를 간략하게 한 가나문자가 일본에서는 헤이안(平安) 시대에 완성되는데, 이것도 백제, 신라의 토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3) 학문의 전수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13년(513)에는 일본의 게이타이왕(継体王)의 초청을 받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가 일본에 건너가서 5경(詩經, 書經, 易經, 春秋, 禮記)을 가르쳤다. 이로부터 각종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문화에 공헌했다. 또 동왕 16년(516)에는 오경박사 고안무(高安茂)가 단양이와 교체해서 건너갔다.
백제 26대 성왕(聖王) 30년(553)에는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曆博士)가 건너가서 복서(卜書), 역서(曆書), 약물, 채약술(採藥術) 등을 가르쳤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3년(602)에는 승려 관륵(觀勒)이 역본(曆本), 천문지리서,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의 책을 일본에 전했다.
2. 불교의 전수
불교는 삼국의 고구려가 372년에, 백제가 384년에, 신라가 527년에 각각 전래되었다. 백제 26대 성왕 30년(552)에 승려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불상과 경론과 불교를 신앙하도록 권하는 성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불교를 전했다. 백제 27대 위덕왕(威德王) 1년(554)에는 승려 담혜(曇慧)가 일본에 가서 전교하고, 이어서 혜이(慧爾), 도흔(道欣), 의각(義覺), 도녕(道寧) 등의 승려가 건너갔다.
한편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6년(595)에는 혜자(慧慈)가 일본에 가서 성덕태자 (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고, 동년 백제의 혜총(慧聰)이 가서 혜자와 함께 호오코사(法興寺)에서 전교를 했다. 고구려 영양왕 26년(610)에는 승려 담징(曇徵)이 가서 호오류사(法隆寺)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 그리고 화구(畵具), 지먹(紙墨), 가루를 내는 방아(전개)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3. 사원의 건축
588~596년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는 아스카사(飛鳥寺)는 백제인이 세웠고, 593년에 창건된 시덴노사(四天王寺)는 신라인이 세웠으며, 호오류사(法隆寺), 호오키사(法起寺), 호오린사(法輪寺), 고류사(廣隆寺), 구다라사(百濟寺) 등은 모두 백제인과 관계가 깊다.
4. 여러 가지 기술의 전수
1) 토목 기술의 전수
백제 8대 고이왕(古爾王) 50년(276)에 백제인에 의하여 연못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일본에 토목 기술을 받아들인 효시이며, 이 연못을 가라비도이케(韓人池) 또는 구다라이케(百濟池)라 한다. 323년에 마무다노츠츠미(茨田堤)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하여 축조되었다. 665년에는 오노성(大野城)(大宰府의 북방 표고 410m의 오노산의 정상부)이 농성을 목적으로 한 백제식의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사이키(佐伯有淸)는≪일본과 조선의 2천년≫에서 조선계 씨족과 그 후예 항에서이 두 성은 백제의 부소산성과 청마산성의 두 산성의 배치와 매우 흡사하고 또 성의 양식은 그 구조로 봐서 분명히 조선식 산성이다. 억례(憶禮), 복유(福留), 사비복부(四比福夫) 등 백제인들의 지도하에 구축된 성임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2) 목축법의 전수
284년에 양마 두 필이 한반도에서 전해졌다. 이로써 키가 크고 속력이 빠른 승마에 적절한 대륙 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요시다=吉田光邦 저, 《일본 과학사》).
3) 직조 기술의 전수
283년에는 봉의공녀(縫衣工女)가 일본에 건너갔다.
4) 의약의 전수
일본은 414년 잉쿄(允恭) 3년에 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를 조선에서 초빙했다. 686년 백제 승려 법장(法藏)이 텐무(天武)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미노(美濃―현재 기후현)에 파견되어서 삽주 뿌리로 전약(煎藥)을 만들었다.
5) 정원 조원술(造園術)의 전수
612년에 백제귀화인에 의하여 궁전의 남정에 수미산(須彌山)과 구레교(吳橋)를 만들었다.(吉田光邦 저, 日本科學史)
6) 예술(음악, 무용)의 전수
453년 잉쿄(允恭)왕의 장례에 신라에서 80명의 악인(樂人)이 파견되었고, 554년에 백제에서 4명의 악인이 파견되었다. 601년에는 백제에서 무용가인 미마지(味摩之)가 가서 사쿠라이(櫻井)에 살게 하고 음악과 무용을 소년들에게 교육시켰다.
이상과 같이 나라(奈良)의 아스카(飛鳥)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Ⅳ. 통일 신라 시대의 한 ․ 일 관계
1. 국교의 단절
신라의 통일 전쟁 시에 백제의 왕족인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왕자 풍(王子豊) 등에 의하여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이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옛 땅 백강(白江)에서 싸웠으나 결국은 신라군에 패하였다. 이로 인해서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더욱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고구려 유민이 건국한 발해가 당 나라와 대결하면서 일본과의 국교를 맺게 되었다. 728년에 발해에서 일본에 사신이 파견된 일이 있다.
신라와 일본과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따라 730년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
2. 비공식적인 민간 무역
통일 신라 시대는 국교는 없었으나 일본의 귀족들의 요구에 의하여 민간 차원의 비공식 무역이 행해졌다.
신라에서는 거울(鏡), 백동반(白銅盤), 백동향로(白銅香爐), 황금, 사향(麝香), 주사(朱沙), 인삼, 꿀 등을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는 면(綿)을 수입했다. 무역지는 나가도(長門―현재 福岡縣 북서부), 지쿠젱(筑前―현재 山口縣 북서부), 잇키도(壹岐島) 등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교역에 응하기 위하여 신라어학생이라는 통역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 말기의 호상인 장보고(張保皐, 張寶高)는 당시 해운계의 왕이었는데, 하카다(博多)에 지점을 두고 활약했다.
3. 조와법(造瓦法)
869년에 하카다에 해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미 일본에 들어와 있던 신라인 윤청(潤淸)등 30여 명이 해적이라는 혐의로 잡혀, 윤청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무쓰국(陸奥国)에 옮겨져서 거기서 기와 만드는 법을 가르쳐 보급했다. 그 결과 신라 계통의 장상화문등와(庄相花文燈瓦)가 만들어져서 무쓰고쿠부사(陸奥国分寺)의 부흥에 공헌했다.
4. 신라계 도래인의 정착
신라 말기에는 국내 질서가 문란해서 생활이 어려워졌으므로 많은 사람이 유민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록에 의하면 811―983년 간에 25회에 걸쳐 1천여 명이 간토오(關東)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Ⅴ. 고려 시대의 한 ․ 일 관계
고려가 건국한 918년에서 1392년 멸망하기까지는 거의 정식 국교가 없다가, 겨우 고려 말기에 아시가카 막부(足利幕府)와의 국교가 있을 뿐이었다.
1. 대장경의 보급
1073~1090년 사이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동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의 불경과 소(疏) 4,700권을 모아 속대장경을 편찬하였는데, 일본 불교계에서는 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을 했었다.
1389년에 아시가카(足利) 막부는 승려 묘하(妙芭)를 파견해서 국교를 맺고, 대장경의 전수를 요구해 왔다. 이로부터 140년간 20회에 걸쳐 대장경을 요구해온 기록이 있다. 현재 교토(京都)의 난레사(南禮寺)에 1,715권,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에 40권, 나고야(名古屋)의 싱후쿠사(眞福寺)에 4권이 전해진다.
2. 왜구 침입의 격화
고려 456년 간, 왜구의 침입은 합계 292회나 되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 더 격해졌다. 그 중 유명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왜구 등경광(藤經光)의 전라남도 지역 침입
전라도 순문사(巡問使) 김치선(金致先)의 계략에 의하여 물리쳤으나 이르는 곳마다 부녀자, 유아가 남김없이 살해당했다.
2) 왜구 패가대만호(覇家臺萬戶)의 김해(金海) 지역 침입
50여 척의 배로 침입했는데 김해부사 박장(朴藏)에 의하여 전멸시켰다.
3) 아기바쓰 (阿只拔都)의 삼도(三島) 침입
1380년 우왕(禑王) 6년에 500척의 배로 침입하여 내륙 지방 영동(永同), 황간(黃澗) 등지까지 침입하여 서울인 송도(松都)가 위협을 받게 되었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이를 격퇴했다.
3. 고려자기와 금속활자
고려자기는 1050년에서 1350년까지 만들어지고, 또 금속활자는 1234년에 발명되었는데, 이들 고려 특유의 공예품은 시대가 지나서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을 모방할 수도 없어서 단지 감상하기에 그칠 정도였고, 활자도 만들지 못했다.
Ⅵ. 조선시대의 한 ․ 일 관계
1.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유화책과 왜구 금압.
일본 아시가카 막부는 국가를 통제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태조 이성계는 서일본의 여러 호족을 우대하고 왜구를 금압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대마도의 종씨(宗氏)와 우호 관계를 맺고 여러 다른 호족과도 관계를 맺었고, 국내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어서 왜구의 활동이 조용해졌다.
1) 왜구가 투항해 왔다.
2) 귀화하는 일본인이 생겼다.
3) 왜에게 포로가 된 사람이 송환돼 왔다.
2. 세종의 사절 구분 예우
일본과는 국가를 대표해서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하는 상대의 일본 국내에서의 지위, 해상 세력의 영향력 대소, 신뢰의 정도 등을 4개 등급으로 나누어 대우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 국왕사(國王使)
2) 거추사(巨酋使)
3)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대마도주특선송사(對馬島主特選送使)
4) 기타
등으로 구분하여 대우했다.
3. 대마도에 대한 대우
1) 세사미두(歲賜米豆)
평화적인 통교자에게는 쌀이나 콩을 주었는데, 1443년에는 도주에게 200석을 정하여 하사했다.
2) 세견선
대마도주를 상대로 연간 50척만 입항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약정(계해조약)을 맺었다.
3) 조어조약
출어자는 대마도주의 도항 증명서를 가지고 조어를 하도록 했다.
4) 삼포 개방
부산포, 제포(齊浦), 염포(鹽浦)에 한해서 입항할 수 있도록 했다.
4. 삼포왜란
계해조약에 따라 삼포에 거주할 수 있는 호수는 60호였는데 해마다 그 수가 증가되어 성종(成宗) 때에는 525호, 3,105명에 이르렀다.
1510년 중종(中宗) 5년에는 대마도주 소오사다모리(宗貞盛)에 대하여 계해조약에 따라 증가된 인구는 철수하도록 요구하고 선박의 입출항을 엄하게 조사했다. 이 조치에 불만을 가지고 삼포의 왜인과 지원군 4천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진압되어 임신조약을 체결하고 더 엄한 규제를 하게 되었다.
5. 임진왜란과 그 영향
1592~1598년간에 두 번에 걸쳐 왜군의 침략이 있었다. 수군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전멸되었으나, 육상 군은 전 국토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곧 인명의 피해, 문화재의 손실, 국토의 황폐화와 언어, 문화, 정신상의 두드러진 변화를 초래했다.
반대로 일본은 문화재를 탈취하고, 기술자를 포로로 하여 끌고 가서 일본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이용했다.
1) 도자기 제조에 기여
임진란으로 포로가 된 도공(陶工)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도자기 제조 기술을 발달 시켰다.
이삼평(李參平)--아리다야키(有田燒)
팔산(八山)-------다카도리야키(高取燒)
거관(巨關)-------히라도야키(平戶燒)
존해(尊楷)-------우에노야키(上野燒)
이작광(李勺光), 이경형(李敬兄)-----하기야키(萩燒)
김해(金海)-----사쓰마야키(薩摩燒)
심당관(沈當官)--나에시로야키(苗代燒) 등이다.
2) 금속 활자 인쇄에 기여
일본은 1593년 임진란 때에 서울 활자 주조소에서 약탈해간 활자와 인쇄 기구를 가지고 동년 고요오세이(後陽成)왕의 명에 따라 고문효경(古文孝經)을 인쇄했다. 이것이 일본에서의 활자 인쇄의 시작이다. 또 1615년에 ≪대장일람(大藏一覽)≫, 1616년에 ≪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의 서책이 임오관(林五官)의 지휘하에서 준부(駿府)(현 시스오카)에서 인쇄되었다(李進熙, ≪李朝의 通信使≫).
3) 의학 서적의 전수로 인한 의술의 발달에 기여
한국의 대표적인 의학 서적 ≪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신증의법대성발제(新增醫法大成發提)≫,≪의방고(醫方考)≫,≪의방류취(醫方類聚)≫≪치종지남(治腫指南)≫,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이 발간되어 의술의 발달에 기여했다.
4) 주자학의 발달에 공헌
한국 유학의 석학 이 퇴계(李退溪) 선생의 전집이 이미 일본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임진란 때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거유 강 항(姜沆)이 당시 불교의 승려였던 후지와라세이카(藤原惺窩)에게 3년 간 주자학을 가르쳤는데, 후지와라는 마침내 1600년에는 심의도포(深衣道袍) 모습으로 환속해서 일본 근대 유학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동학인 하야시라산(林羅山)이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정치에 참가하여 막부의 외교 의례를 맡게 되어 유학 예법이 사회에 보급되게 되었다.
6. 통신사에 의한 문화의 전수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주 종씨로 하여금 국교 회복을 주선하도록 하여 마침내 국교가 회복되자, 1607년에서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보냈다.
통신사 일단은 평균 200―300명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정치, 경제, 문학, 기술,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일행이 에토(江戶)까지 가는 도중 숙박하는 곳곳에 문화적인 영향을 끼쳤다. 곧 한시의 필담이 이루어졌고, 시서화 등 작품을 곳곳에 남겼다. 그리고 한국 특유의 공예품인 고려자기, 이조자기, 나전칠기 등과 서적이 동시에 다량 들어가서 일본이 서양에 개방되기까지의 문화에 크게 공헌했다. *
이상 개략적인 한일 관계를 엮어보았는데 이처럼 일본은 옛날에는 우리 조상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말에 이르러 무모한 침략으로 병합에까지 이르는 불행한 일이 있었음은 우리가 꼭십어 명심해야 할 일이다.(졸저 《숲은 새들을 날아오게 한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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