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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13,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야기 (2/5)

간천(澗泉) naganchun 2024. 8. 27. 03:08

13,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야기 (2/5)

 

2, 어린 시절

 

코페르니쿠스는 1473219일에 토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구시가지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있다. 당시 토룬은 13년 전쟁의 결과로 왕령 프로이센의 일부가 되었지만, 1772년 폴란드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폴란드의 일부로 복귀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민족주의 시대에는 코페르니쿠스가 독일인인지 폴란드인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15세기에 민족 국가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현재는 그를 독일계 폴란드인으로 여긴다. 왕국 내의 공용어는 라틴어와 폴란드어였고, 그가 크라쿠프(University of Krakow) 대학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폴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폴란드어로 쓴 문서는 현재 발견되지 않았고, 실제로 일상 회화를 넘는 수준으로 폴란드어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성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 표기의 Copernicus를 폴란드어로는 "코페르니크(Kopernik)"가 된다. 이 단어는 게르만계의 "구리"를 의미하는 단어에 슬라브계 접미사 -nik이 붙은 것으로, 폴란드의 실레지아 지역 오폴레 주에 있는 오래된 구리 광산 도시 코페르니키(Koperniki)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레지아 지역은 13세기에 몽골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주민들이 피난하여 뿔뿔이 흩어지거나 뒤늦게 도망치다 죽임을 당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기 때문에, 폴란드의 그 지역 영주들은 부흥을 위해 서쪽에서 많은 독일인 이민자들을 초청했다(독일인의 동방 식민). 이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의 부계 조상(적어도 일부)은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로 인해 그 일가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페르니쿠스가 10살이었을 때, 구리 무역을 하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 바르바라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어머니 쪽 외삼촌인 루카스 바첸로데( (Lucas Watzenrode the Younger) (영어판)가 아버지의 죽은 후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형제를 양육했다. 루카스는 당시 교회의 율수 사제(카논)였으며, 이후 왕령 프로이센의 바르미아 주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형제 안드레아스는 왕령 프로이센의 프롬보르크(독일어명 프라우엔부르크)의 카논이 되었고,

누이 바르바라는 베네딕트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다른 누이 카타리나는 시의 평의원였던 바르텔 게르트너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