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베르나 폰 브라운 이야기(4/4)
4, 우주계획에 관심
1952년 폰 브라운은 75미터 직경의 우주 스테이션이 고도 1700km 궤도에서 자전하며 인공중력을 발생시킨다고 예견했다.
폰 브라운은 이후 월트 디즈니(Walt Disney、1901-1966, 미국 애니메이션작가)가 이끄는 디즈니사의 우주탐험에 관한 TV 영화 제작에 기술감독으로 참여하며, 대중의 우주 계획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디즈니사에서 계속 일했다.
1) NASA시대
1958년 7월 29일 NASA가 법률상 성립하였다.
이튿날 50번째의 레드스톤로켓이 핵실험 하드다크작전(Operation Hardtack)의 일부로서 남태평양의 존스톤섬(Johnston Atoll)에서 성공리에 발사되었다.
2년 후 NASA는 알라바마주의 헌츠빌(Huntsville)에 마샬우주비행센터를 신설하고 폰 브라운과 그의 개발팀은 레드스톤 병기창에서 NASA로 이적하였다. 폰 브라운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동 센터의 초대소장을 역임했다.
마샬우주비행센터의 첫 일은 1960년에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지휘하에 계획이 출발한 우주비행사를 달에 운반하는 새턴(Saturn)로켓의 개발이었다.
폰 브라운은 어릴 때의 방침이었던 <시대를 움직일 것>그 후의 꿈으로서 인류가 달 바닥을 밟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1969년 7월 16일 마샬우주비행센터가 개발한 새턴로켓이 아폴로 11호의 탑승원을 발사한 때에 현실로 되었다.
아폴로계획 과정에서 6조의 우주비행사 팀이 월면을 탐험했다.
1970년 폰 브라운과 가족은 헌츠빌에서 워싱턴DC로 이사하여 NASA본부의 계획담당부장관보에 임명되고 테크노그라트로서의 역할을 다하는데 아폴로계획 후 폰 브라운은 그의 장래의 우주비행의 방침이 NASA의 것과는 다르다고 느껴서 1972년 6월에 NASA를 사임하였다.
그는 메린란드주 쟈만타운(Germantown)에 있는 훼아차일드(Fairchild)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미국우주연구소(1987년에 설립된 현재의 미국우주협회의 전신)를 창립하고 진흥시키는 활동을 행하였다.
5, 사거
우주협회의 정점에서 폰 브라운은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술을 받았지만 암은 진행하여 1976년 12월 31일 회사에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7년 6월 16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거했다 향년 65세였다.
출처=https://www.astroarts.co.jp/news/2012/03/23vonbraun/index-j.shtml
'세계의 과학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파울 에를리히 이야기 (2/3) (0) | 2024.08.13 |
---|---|
11, 파울 에를리히 이야기 (1/3) (0) | 2024.08.12 |
10, 베르나 폰 브라운 이야기(3/4) (0) | 2024.08.08 |
베르나 폰 브라운 이야기(2/4) (0) | 2024.08.07 |
베르나 폰 브라운 이야기(1/4) (0) | 2024.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