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조선 침략과 조선 왕실의 멸망
일본작가 쓰노다후사코(角田房子)가 지은 <민비암살>에서 밝힌 조선왕실의 멸망 사실을 96주 3. 1절을 맞아 참고로 게재한다. |
1886년 명성황후의 죽음으로부터 헤아려 3년 후에 1889년 2월 22일 78세를 일기로 대원군이 세상을 뜨고, 1919년에 고종도 사망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순종도 1926년에 사망한다. 그때까지의 약 30년간의 세월의 흐름 속에 한일관계는 크게 변화해 간다.
1895년
10월 26일 태양력의 채용을 결정함
1896년
2월 11일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 친로파가 고종과 왕태자를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김. 이것을 노관파천이라 한다.
2월 12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 노상에서 군중에게 살해됨.
2월 13일
친로 내각 성립. 이날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살해됨.
2월 18일
러시아 공사관 내에서 정무를 보는 고종이 의병 해산 조칙을 공포함. 그러나 의병 운동은 점점 성해져서 충주 방면에서 일본군과 충돌함.
7월 7일
신임 일본 공사 하라 다카시(原敬) 착임.
하라는 외무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8월 19일부 보고서 <조선의 현황 및 장래의 경향에 부쳐>에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민 일반은 물론 재류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배일 풍조가 매우 성하여 우리들의 행위에는 무엇이든 묻지 않고 모두 반대하는 정세이고,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내정 간섭의 반동과 작년 10월 8일 왕비 살해 사건과 원인이 있음>
1897년
1월 6일
민비 시호를 명성(明成)으로 결정함.
2월 20일
고종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함.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왕비 민씨를 황후,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함.
11월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을 거행함.
1898년
2월 22일
대원군 사망. 만 78세였다.
고종은 친아버지인 대원군의 장의에 출석하지 않았다고 전해짐. 이것도 일예인데 민비 암살 사건 관계자에게 대한 고종의 증오심은 강하여 일본에 망명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宣)도 후에 조선에서 온 자객에 의하여 살해됨. 고종에게는 민비 사 후에 엄비(嚴妃)도 있고 그밖에 많은 여성을 가까이는 하였으나 둘도 없는 반려로서 사랑한 것은 민비뿐이었을 것이다.
1904년
2월 10일
일로 전쟁 발발함.
2월 23일
일한의정서 조인. 한국은 일본군에 의한 한국내의 전략 요지 수용을 승인함
10월 12일
일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차군 사령관으로 서울에 입성함.
11월 5일
전 독립협회 회원 이승만(李承晩)이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도미하기 위하여 인천으로 출발함.
1905년
3월 22일
최익현(崔益鉉),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상소하여 일본군 헌병에 체포됨.
3월 25일
고종, 러시아에 일본을 견제해 주기를 호소하는 밀서를 상해 주재 러시아군 소장 데시노에게 전달함.
10월 16일
일로 평화 조약(포스마스 조약) 공포함.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대사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보호조약을 강행하기 위하여 한국에 건너 옴.
11월 15일
이토오 히로부미, 고종에게 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을 강하게 요구함.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한국보호조약) 조인, 18일 군중 대한문 앞에 쇄도하여 신조약의 파기를 주장함.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 자결함.
12월 20일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함.
1906년
3월 2일
초대통감 이토오 히로부미 착임함.
1907년
4월 20일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출석하기 위하여 출국함. 밀서의 내용은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한 실정을 세계에 호소하는 것임.
6월 29일
헤이그 밀사, 평화회의에 참가 신청을 하고 거부당함. 7월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함.
7월 3일
이토오 통감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을 추궁함.
7월 18일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전 각료, 고종의 양위를 권고함. 대한자강회, 동우회, 기독교청년회 회원 2천여 명 대한문 앞에서 양위 반대 시위함.
7월 19일
고종 양위 조칙을 발함.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조인, 차관 정치의 개시. 일본의 한국 내정 감독권이 확립됨.
7월 31일
군대해산 조칙 공포(8월 1일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을 거행함)
8월 1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성환(朴星煥) 자결. 시위대의 일부 서소문동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제3차 의병 운동의 개시)
8월 7일
영친왕 은(垠) 황태자로 책봉.
8월 27일
순종황제 경운궁에서 즉위함.
10월 7일
일본군 헌병대가 경찰권을 장악함.
12월 5일
황태자 은(垠) 이토오와 동반하여 토교에 유학.
1908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이후 일본인 한 층 성해짐. 이해 한국 각지의 의병과 일본군과의 교전 1976건. 교전 의병수 8만2676명
1909년
6월 15일
이토오 히로부미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
7월 6일
일본의 각의,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결정. 천황의 재가를 받음.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오를 암살.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리대신 이완용과 회견.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한일병합 조약에 조인.
8월 29일
양위 조서.
한일병합 조약을 공포함. 대한 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함.
10월 1일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임명함.
1911년
4월 17일
토지수용령을 공포, 시행.
8월 23일
신민교육과 일본어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교육령 공포.
1919년
1월 21일
고종 덕수궁에서 붕어. 만 67세였다. <사인은 독살>이라 전해진다. 고종의 제3왕자 영친왕의 비였던 방자는 저서<흐르는 대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발병이 전해진 1월 21일의 전날 밤 이태왕님은 기분 좋게 측근들과 옛날이야기를 하신 후 밤이 깊어서 일동이 물러난 후 차를 마시고 침소에 돌아가셨는데 얼마 없어 갑자기 괴로워하셔서 그대로 곧 절명하셨다고. 퇴위 후에도 남모르게 국력의 만회에 부심하고 계시던 이태왕님은 파리에 밀사를 보낼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던 듯 그것이 다시 일본 측에 발각된 일로 총독부의 밀명을 받은 시의인 안상호(安商鎬)가 독을 넣은 것이 진상이라고도>
3월 1일
고종의 국장을 2일 앞에 둔 날, 항일 독립 운동의 역사에 남을 <3, 1독립 운동>이 일어남.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서울의 파고다 공원을 비롯하여 독립 요구 시위가 이어져서 전국에 파급되었다. 총 참가자 136만 명, 사망자 6670 명, 부상자 1만 4600 명, 투옥 5만2730 명 이것을 3, 1만세 운동이라 한다.
9월 2일
간우규(姜宇奎) 신임 총독 사이토 마고토(齋藤實) 일행을 남대문 역두에서 습격 미수.
고종과 민비의 묘소는 서울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정도의 금곡릉(金谷陵)이다. 자연 공원 같은 광대한 부지에 안의 한국 독특한 주(朱)를 살린 화려한 색채의 묘당이 지금은 고종과 민비 둘 만의 사는 그들의 왕궁이다. 여기는 왕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의 생모 엄비마저 모셔져 있지 않다. 고종과 민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휘어진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위에 얌전하게 줄을 선 액막이 소동물 뿐이다.
1926년
4월 26일
순종 창덕궁에서 붕어 만 52세였다.
이해 12월 일본의 연호는 다이쇼(大正)에서 쇼와(昭和)로 바뀌는데 한일 병합으로부터 16년이 지난 이 때에도 조선 사람들의 독립에의 열정은 쇠함을 보이지 아니한다. 순종 붕어 후 2일 째인 4월 28일 송학선(宋學先)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총독의 암살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인 4명이 찔려 죽었다.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이 행해진 이 날, 6, 10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청년과 학생이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학생 160 명이 검거되었다.
순종의 병상 악화의 통지를 받고 남편 영친왕과 함께 토교에서 서울로 달려온 방자(方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합 전 한국 최후의 국왕이었던 형님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애도를 눈물과 함께 올리고 쓸쓸한 일생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이조 말기의 집정권을 빼앗긴 민비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 소년시절에는 눈앞에서 어머님이 일본인 장사에 의하여 참살될 뿐 아니라 그 2년 후에 아슬아슬하게 부왕과 함께 측근 때문에 독살될 뻔했기 때문에 치아가 빠져있었습니다. 병약하기도 하셨던 형님--- 언제나 드라마의 그늘에서 가엾은 역할을 다하시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순종에게는 자식이 없다. 민비 직계의 핏줄은 여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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