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작 뉴턴(1642~1727) 이야기(7/13)
==떨어지는 사과에서 힌트를 얻어 근대과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3) 요직 취임(장관, 왕립협회 회장, 기사칭호)
조폐국장관으로서
뉴턴의 부탁을 받고 있던 제자인 몬태큐(Robert Montagu. 1634-1682)가 이윽고 재무대신이 되자 뉴턴은 1696년 4월에 몬타큐의 소개로 왕립조폐국감사로 취임하고 1699년에는 조폐국장관(Master of the Mint)이 되었다.
뉴턴은 취임하자 곧 통화 위조자를 체포하고 이를 계기로 조직의 오점을 씻기 시작하여 처벌방침을 내놓았다.
부하인 수사관을 시켜 수사를 진행하고 위금제조신지케이트의 두목인 윌리암 샤로나를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뉴턴이 조폐국장관을 재직하는 동안에는 위조금 제조가 격감했다고 한다.
한편 뉴턴은 화폐주조를 위하여 화폐의 정확한 중량이나 그 측정기준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곧 1기니(guinea)의 금화=21실링은화가 타당하다고 권고했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양 환산으로 1대15. 21로 정했다. 이것을 <뉴턴비가(比價)>라 부른다. 기니((guinea)란 <기니산 금으로 만든 데서> 1663년부터 1813년까지 주조된 영국의 금화를 말한다.
이에 따라서 은화가 녹여져서 은의 주괴(鑄塊)가 금화와 교환되는 사태를 일으켰다. 이 결과로서 은화가 실질적으로 가치를 손해 보게 되어 영국은 사실상 금본위제로 이행하였다.
조폐국장관 근무시대에 뉴턴은 급료와 특별수당으로 2000파운드를 초과하는 연수익을 얻어서 꽤 금전적 여유를 얻었다.
이 직책은 1696년부터 1727년 사망할 때까지 종생 이 일을 맡았다.
왕립협회 회장으로서
1703년에 왕립협회 회장이 된 뉴턴은 사망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뉴턴이 왕립협회회장이 되자 왕립협회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없어져서 규칙을 따라야 하는 괴로운 것이었다. 왕립협회를 이사하는 것도 뉴턴의 독단으로 결정되었었다.
로버트 후크(Robert Hooke、1635-1703, )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는지 모른다. 뉴턴 사후 왕립협회 회장이 된 사람 한스 스론(Sir Hans Sloane, 1793-1878, 영국 의사, 박물학자)은 괴로운 규칙을 다 풀었다.
뉴턴은 그 정치력으로 각 대학에 자신의 측근인 인간을 보냈다. 이리하여 영국의 과학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뉴턴의 성을 거스르면 대단했다.(성을 잘 내는 뉴턴과 잘 지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기사의 칭호를 받음
1705년 자연철학의 업적으로 앤 슈트어트 여왕으로부터 기사의 칭호를 받았다. 자연철학(자연과학)의 업적으로 기사칭호를 받은 사람은 뉴턴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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