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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몽고의 통치력 군사력의 비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1. 1. 04:55

 

몽고의 통치력 군사력의 비결

 

몽고 기마병

 

몽고제국은 중국 본토와 중앙아시아, 중동 그리고 본국에서 7000 Km나 떨어진 동유럽에 걸친 대판도를 어떻게 해서 정복하고 300여 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는가?

 

통치제도

징기스칸은 잔인성을 가지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자였다. 이 징기스칸의 현실주의는 제국 통치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천호장(千戶長)이 천호를 통솔하는 천호군단이 조직되었다. 이것은 생활 단위와 군사 단위가 일원화 한 것이었다. 몽고제국은 <생활=전투>이다. 또 정복된 도시에는 황제(대한)를 대리하는 <다루가치(행정관)>을 두어서 점령지의 감시, 경찰, 공납의 운송을 맡겼다.

그런데 몽고 본토 이외에 이주한 몽고인은 겨우 1만 2천호였다. 일단 모반이 일어나면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수로 그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통치했던 것이다.

 

<잠치>라는 역전제

몽고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성취한 대제국이었다. 지배영역이 너무 넓어서 모든 지역에 군단을 배치할 수는 없다. 한편 감시하는 자가 없으면 반란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래서 징기스칸이 짜낸 것은 <잠치>였다. <역전제> 체제로 제국 내에 정보를 몽고본국에 보고하는 일, 본국의 명령을 제국 내에 전달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간선도로변에 <잠치>를 두어 부근 주민에게 말이나 식료를 공급시키고 그런 수고를 하게 하였다. 이 정보 네트워크에 의하여 몽고제국의 급한 사절은 신속하게 이동할 수가 있었다. <잠치>는 현대의 인터넷과 같았다. 다른 것은 정보량과 속도뿐이었다.

이 <잠치>가 있으면 모반, 반란이 일어나도 바로 본국에 전달되고 몽고대군이 달려와서 마을은 모두 파괴되고 주민은 살육되었다. 이런 징벌이 몇 번 반목되는 사이에 모반은 일어나지 않게 되고 이것이 소수의 몽고인으로 대다수의 피정복민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였다.

 

경기마병과 고성능 무기

역사상 최강이라 하는 몽고군은 달리 유례가 없는 특징이 있었다. 먼저 몽고군은 모두가 기마병이었다. 원정 시에는 한 사람의 기마병이 7-8두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이나 전투가 말을 없애기 때문이다.

몽고군의 말은 작으나 내구력이 강했다. 하루에 70-80 Km를 이동할 수가 있었다.(알렉산더는 1일 30 Km를 이동하였다)

한 편 몽고군과 싸운 유럽군은 보병이 중심이었다. 기마병은 있었으나 적었다. 게다가 철사 그물 갑주와 투구를 쓴 중기마병이었다. 한 편 몽고군은 가죽 갑주를 입은 경기마병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면 몽고기병은 경쾌하게 전장을 질주하고 유럽 중기마병에게 비 오 듯 활을 쏘아댔다. 그러고서 순간에 사라진다. 그러므로 유럽군의 화살에 명중하는 일이 적었다.

몽고군의 주력은 작은 말로 질주하는 경기마병인데다 고성능 무기를 썼다. 공성전에 쓰는 파성퇴(破城槌)나 투석기이다. 몽고군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도(刀), 궁시, 손도끼, 줄(쇠를 자르는), 침, 철과(鐵鍋=쇠냄비), 천막, 자리 등 일용품도 휴대하였다. 마치 생활하는 그대로 진군하므로 장기 원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량화 휴대식

몽고군의 휴대식은 몽고식 합리주의의 결정이었다. 경량화하기 위하여 양고기를 극한까지 압축시켰던 것이다. 먼저 양고기를 건조시키고 그것을 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풀고 지방분 같은 여분의 성분을 제거했다. 이 괴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양 한 마리 분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압축했다.

이 양고기 휴대식은 휴대하기 편할 뿐 아니라 전장에서 먹기에도 형편이 좋았다. 뜨거운 물에 담그기만 하면 고기가 풀어져서 국물처럼 마실 수가 있었다. 이 휴대식 주머니 수에 따라 원정기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기동력, 타격력, 병참, 뛰어난 명령 지휘계통 등 모두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철저한 정보수집 분석

징기스칸의 군사작전은 치밀한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모든 작전계획은 철저한 정보수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일을 담당한 것이 사루토 상인으로 그들은 징기스칸의 눈이 되고 귀가 되었다.

고대로부터 실크로드에는 여러 갈래의 루트가 있었다. 그 하나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사루토 상인이다. 사루토 상인은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의 정보를 얻고 그것을 분석하여 일찍이 징기스칸의 장래성을 내다보고 그에 협조하였다.

상인들에게는 교역 루트의 안전이 절대로 필요하였고 징기스칸의 몽고군은 그 안전을 확보해주었다. 그 반대급부로서 사루토 상인은 상인의 입장에서 여러 지역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고 징기스칸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