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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몽고의 세계 침략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0. 25. 05:30

 

몽고의 세계 침략 이야기

 

 

징기스칸

 

 

몽고부족은 12세기 후반까지 몽고고원 동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부족으로 금왕조(金王朝)에 예속하고 있었다. 이 몽고부족 중에 보르지긴(Borjigin)씨족의 예수게이(Yesügei)라는 수령이 있었다. 그가 다다르족에게 살해당하자 그 일족은 흩어지고 어린 아들 테무진(鐵木眞) 모자는 살아남았다. 테무진은 성장함에 따라 흩어진 일족을 모으기에 힘쓰고 다른 부족들을 끌어들이기에도 힘써서 무리를 늘려갔다.

마침내 몽고고원에서 가장 강력한 케레이토족의 완한과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완한의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몽고의 강력한 부족이었던 다이쥬트족과 쟈타란족을 격파하고 다다르족을 멸망시켰다. 마침내 케레이토족의 완한과의 대결에서 완한을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테무진은 몽고고원의 패자가 되고 마침내 1206년에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그 지도자 징기스칸이 전권을 장악하자 그 무서운 힘은 엄청난 속도로 주변 여러 민족에게로 돌려졌다. 끝없이 세계 여러 나라에 엄청난 피해와 비극과 공포를 주었다.

 

■ 중국 대륙 석권

당시 남쪽에는 금(金=1115년에 여진족인 아골타가 세운 나라)나라가 있었는데 몽고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요새도시를 몇 개나 건설하였었고 다시 기병 대군단을 기르고 보병 대군을 가지고 방비에 대비하고 있었다.

금나라에 침공한 몽고군은 파괴적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겨우 몇 시간의 전투로 7만 대군을 무찔렀다. 수년 후 이곳을 여행한 어떤 승려의 한 사람은 산산이 흩어진 인골이 대평원을 덮었었다고 적고 있다.

1211년 금나라의 대군을 유린한 몽고군은 노도처럼 금나라의 수도까지 침공하여 포위하였으나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공략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몽고군은 야전에는 능하였으나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징기스칸과 그 지휘관들은 중국인에게 공성전 방법을 학습하여 서서히 공성전술을 몸에 익혀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도시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농성전은 수 개 월이나 걸렸다.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까지 압박받은 농성군은 마침내 항복하였다. 몽고군의 보복은 처참한 것이었다. 성이 열리자마자 기마군단이 달려들어 목조건물에 불을 놓고 민간인은 모두 검으로 죽였다, 시가지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런 대학살과 파괴의 소식을 듣고 위구르, 글란, 고려 등의 나라는 조공을 바치고 완전 복종하였다. 이윽고 서하(西夏), 서요(西遼)도 항복하였다.

금(金), 송(宋) 2대제국을 석권하여 중국 전토를 휘하에 둔 몽고군은 서쪽으로 창끝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속국 각지에서는 징병이 행해져서 몽고군 규모는 20만을 넘는 대군단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실로 수백만 단위의 사람이 살육되었다고 한다. 

당시 5000만 정도였던 중국 인구는 겨우 30년 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900만 명 정도가 남았었다고 하니 그 학살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노도 같은 힘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무지와 공포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단지 찾아올 잔혹한 학살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 이슬람 국가 침공

1219년에는 다음 목표인 중앙아시아에서 이란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이슬람왕국인 호라즘왕국(1077년~1231년)에 쳐들어가서 결국 저항하는 대로 비참하게 살육하였다.

 

부하라시는 당시 최대의 도시로서 장려한 모스크와 궁전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8만의 수비군을 가진 강력한 요새도시였다.

몽고군의 침입하자 부하라시에서는 공물을 바치고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애원도 받아들이지 않고 주민들 중 기술자를 지외하고 여자는 격리한 후 강간하고 노예로 썼다. 그 밖의 80만의 주민은 남녀노소, 개와 고양이까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살육당하여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때 몽고군은 부하라시의 태수였던 이나루츄쿠를 생포하여 녹은 은을 눈과 귀로 쏟아 부어서 죽였다고 한다.

그때 사자의 수를 기록하기 위하여 시체의 귀를 잘라 모으고 시체는 쌓아올려서 남자, 여자, 아이를 나누어 3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시체 사이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어서 니샤프르(페르샤의 고도)를 함락한 후에는 시체에서 목을 잘라내어 그 목을 쌓아서 거대한 목 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 공략에서는 포로를 앞세워 싸우게 하고 도망치는 자는 사정없이 사살하였다. 몽고군의 공격은 가혹하고 맹렬하였다. 거대한 돌덩이가 비 오듯이 투석기에 의하여 쏘아지고 이로 인하여 성벽은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참하게 살육되었다.     

결국 1년은 견딜 것이라고 믿었던 사마르칸트는 겨우 5일 만에 함락되고 약간의 기술자를 제외하고서 70만 전 인구가 남녀, 노소 없이 죽었다.

 

헤라트((Herāt=아프카니스탄 도시)에서는 실로 160만 명이나 살해당하였고 바그다드에서는 카리프(Caliph、무하마드 사 후 이슬람 공동체, 이슬람국가의 지도자)가 화평을 요구하여 몽고군 진영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약속을 깨고 살해하고 그 후 시내로 침입하여 약탈과 살육을 되풀이 하였다.

200만 명 이상 살았다는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달리 보내졌다. 500년이나 이어온 카리프(지도자)의 혈통은 끊어졌다. 모스크나 궁전은 불타버리고 중동 최대의 상업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시내에서 학살당한 시체가 썩는 냄새로 몽고군은 야영지를 철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몽고군이 질풍노도처럼 서진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이란 전토에 걸쳐서 모든 도시는 파괴되고 대학살을 당하여 무인지경이 되고 말았다.

 

몽고의 유럽 정복

 

 

몽고제국의 영역

 

 

1227년 8월 18일 징기스칸이 진중에서 사망하여 1229년 징기스칸의 제3자 오고타이가 제2대 황제로 즉위하고 1235년 수도 카라코룸(Qaraqorum=현재의 우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Km에 있음)에서 쿠릴타이(Quriltai=중세에서 근세까지 열린 동고 최고의결기관)가 열렸다. 여기서 역사적인 원정이 결정되었다. 죽은 징기스칸이 남긴 사업인 부루가르지방(Volga Bulgaria=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볼가강과 가마강 합류지점에 존재했던 국가)과 킵차크초원(Qipchāq=현재 가자흐스탄에서 몰도바에 걸친 넓은 평원지대)의 정복이다. 그리고 이 원정이 유라시아대륙의 판도를 일변시켰다.

이번 원정군은 몽고 왕실의 왕족 모두가 원정에 참가했다. 징기스칸의 제1왕자 츄치가(家), 제2왕자 차카타이가, 제3왕자 오고타이가, 제4왕자 둘위가의 왕자가 병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총사령관은 제1왕자인 츄치가의 바트우가 임명되었다. 유명한 몽고제국 유럽 제2차서방대원정이다.

1236년 바트우가 이끄는 주력군은 부루가루지방 공격을 개시했다. 전 번의 몽고제국 서방대원정에서는 츄베 스프타이군이 이 지방을 공략했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철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가루지방 전토가 파괴되고 주민은 학살되었다.

이듬해 바트우군이 가스피해 북방 킵차크초원을 모두 정복하여 루시(러시아)로 진출하였다. 또 1237년 12월 21일에는 랴산에서 모스코우, 우라디미르공국에 침입하여 수도 우라디미르를 비롯한 14개 도시를 모두 공략하였다. 산처럼 시체가 쌓이고 쓰레기가 넘쳐났다.

그런데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바트우군은 노보고로도의 100Km 가까이까지 진군한 후 갑자기 180도 방향을 바꾸었다. 노보고로도공 알렉산더 네프스키와의 결전을 피한 것이다. 몽고군은 항간에 떠도는 이미지와는 달리 무모한 전쟁은 피하였다. 전투 전에 철저히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현실적인 작전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승산이 없었고 심대한 손해를 입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1238년 겨울에서 1239년 봄에 걸쳐서 바트우군은 킵차크초원을 평정하고 이것이 후의 킵차크한국이 되었다. 바트우군은 쉬지 않고 진군하여 1239년 루시(러시아)의 어머니라 하던 키예프를 공략하고 약탈과 파괴를 마음껏 행했다.

공포에 밀려난 주민들은 헝가리나 폴란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를 몽고군은 추격하였다. 몽고군은 2파로 나뉘어 1군은 폴란드로 다시 1군은 헝가리에 침공했다. 노도 같은 몽고군은 러시아를 뚫고 동유럽까지 쳐들어갔다.

 

유럽군의 항전과 완패

1240년 차카타이가의 장군 베타가 이끄는 3만의 군단이 폴란드왕국에 침입하여 유럽의 일각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공포에 떨던 독일 시레지아공 헨리2세는 독일, 폴란드, 튜톤 기사단의 대연합을 편성하여 와르슈다트 평원에 군대를 진군시켰다. 그 병력은 겨우 1만으로 최초로 몽고군과의 접전을 벌리게 되었다.

1241년 4월 9일 양군은 와르슈다트 평원에서 격돌하였다. 유럽군은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싸고 기사도정신으로 싸웠으나 몽고 기병대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기동력에 뛰어난 몽고기마병은 전장을 질주하고 유럽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드디어 유럽군은 괴멸하고 많은 병사가 살육되었으며 유럽연합군은 완패하였다.

와르슈다트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한 베타군은 헝가리까지 추격하여 주력군인 바트우군과 합류하여 헝가리 평원에 돌입하여 그들을 전멸시켰다.

오고타이가의 가단군이 헝가리의 동남부에 진출하여 헝가리는 파괴 약탈 살육되고 대평원은 피투성이가 되고 몽고군은 동유럽을 손에 넣었다.

 

■ 원정의 종결

중세 유럽은 기독교의 교의가 언론의 자유나 과학의 합리성까지 부정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럽제국은 몽고제국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공격에 손을 쓰지 못하였다. 1242년 3월 헝가리를 포위하고 있던 몽고군에 제2대 황제 오고타이(1186년~1241년 12월 11일/ 재위1229년 9월 13일~1241년 12월 11일)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전달된 것이었다.

오고타이는 1241년 12월 11일에 죽었다. 그러나 이 부고가 헝가리에 도달한 것은 1242년 3월 곧 3개월 후였던 것이다. 카라콜름에서 헝가리까지의 거리는 약7000Km인데 정보 전달 속도는 매일 78Km로 90일이나 걸린 것이었다. 이 지역에는 잠치(站赤/Jamchi=몽고제국 및 원제국의 역전제. 오고타이한 시대에 제도가 정비되어 차마, 인부, 숙사, 음식물 등이 비치되고 관리, 사자의 호송, 물자의 수송에 이용되었다.) 역전제가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정 중인 몽고군은 정복을 중지하고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왕족들이 제3대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최고의결기관)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몽고군의 유럽 원정은 중지되었고 유럽은 구제되었다. 징기스칸이 1211년 금나라 침공을 시작으로 제2대 황제 오고타이가 사망하는 1241년까지 30년간의 원정이 끝을 맺은 것이었다. 그 후 징기스칸의 자손들이 기 점령지를 바탕으로 하여 5개의 나라를 세우고 1634년까지 몽고대제국의 명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