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 이야기
하트셉수트(Hatshepsut), 고대이집트 제18왕조5대 파라오이다.
(재위는 기원전1479년 - 1458년 무렵)
창조와 건설을 좋아했던 여성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탄생하기 1500년 전 옛날 광대한 이집트 전토를 다스린 위대한 여왕이 있었다. 그 여왕의 이름은 하트셉수트라 하여 그 통치는 약 23년간이나 된다. 그 사이에 이집트는 무력에 의한 침략은 없고 평화적 외교에 시종하여 창조와 건설만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신념이 평화를 사랑하고 건설을 사랑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환언하면 평화와 미의 창조에 통치의 기본을 둔 것이다. 나일강 강변에 현재도 그녀가 남긴 많은 신전이나 건축물을 볼 수가 있다.
나일강을 남쪽으로 800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가면 서안 단애에는 하트셉수트여왕이 건설한 딜, 엘, 파하리의 장려한 대 장제전(葬祭殿)이 있다.
3층으로 쌓아 올린 광대한 테라스, 그리고 그것을 잇는 대통로, 각 테라스에 사용된 거대한 석주, 어느 것 하나를 들더라도 장대한 아름다운 건조물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것이 3500년이나 옛날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커다란 감동을 받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18세기에 이곳을 여행한 유럽인 여행자는 “이런 곳에 그리스의 신전이 서 있다.”고 생각해서 감격했다고 한다. 확실히 장제전의 외관을 보면 유명한 파르테논신전과 이미지가 같다. 그러나 이 위대한 건축물은 파르테논신전보다 1000년 이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 역사상 몇 사람의 뛰어난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도 하트셉수트는 가장 걸출한 여왕이었다.
하트셉수트란 그녀의 이름은 <가장 고귀한 여성>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남겨진 그녀의 석상을 보더라도 통통한 얼굴에 반듯한 얼굴 어질게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으로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재위BC1479~BC1458)은 고대 세계 최대의 여왕으로서 알려진다. 그에게서 종래 파라오와 같은 위엄스러운 험한 분위기는 없고 기품이 넘쳐흐른다.
건축에 흥미를 나타내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소국으로 분열하여 흥망을 되풀이하던 이집트는 제12왕조에 의하여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도 말기에는 쇠퇴하여서 다시 분열과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 서아시아로부터 노도처럼 침공해 온 힉소스(Hyksos)라는 이민족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는 이집트의 암흑시대가 있었다.
(*힉소스=기원전 18세기 무렵 동방으로부터 이집트에 침입한 이민족의 이름. 셈계이 아모리인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개의 민족의 혼합민족이라고 생각된다. 기원전 1720년 무렵 최초의 외국인 왕조로서 이집트에 군림하여 고대 이집트 제15. 16왕조를 형성하고 나일델타 동북부의 아바리스에 도읍하여 중부 이집트까지 지배했다,)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왕조로 아프메스1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신왕조의 시작이다. 그 3대째 도도메스1세는 두 사람의 왕자와 두 사람의 왕녀를 낳았다. 그런데 두 왕자는 일찍이 죽고 도도메스 1세는 왕위계승을 순조롭게 하기 위하여 측실에서 낳은 아들 도도메스에게 장녀를 왕비로서 인연을 맺기로 하였다. 그 장녀가 하트셉투스였다.
이것은 기원전 1511년의 일이다. 이 때 왕은 아직 12살, 왕비는 15살이었다. 곧 하트셉수트왕 보다 3살이 장이었고 배다른 누나와 동생 사이였다. 도도메스 1세가 죽자 그 남편은 도도메스 2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윽고 둘 사이에는 두 사람의 왕녀를 낳았다. 결국 왕자는 낳지 못하여 측실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도도메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녀는 왕의 그늘에 있을 뿐인 존재가 아니라 면전에 나서서 공동통치를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유는 왕인 도도메스 2세가 병약하여 충분히 정사를 다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녀도 정무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축 등 분야에 대단한 매력을 느껴 이 시기에 그녀는 도도메스 2세의 이름으로 각지에 신전 건축을 행하였다.
공동 통치가 시작되어 9년 째 왕인 도도메스 2세가 죽자 하트셉수트는 23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그녀는 왕위계승을 원만히 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버지 왕 도도메스 1세가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하였다. 곧 그녀는 장녀인 네푸르라를 측실에서 태어난 도도메스 3세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고대 이집트 처음의 여성 파라오의 탄생
도도메스 3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섭정이 되어 정무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도도메스 3세의 이름으로 통치를 행하던 그녀는 섭정 6년째 스스로 파라오라 칭하고 면전에 나서서 통치를 행할 것을 선언하였다. 고대 이집트 사상 맨 처음의 여성파라오의 탄생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스스로를 여자 호르스(Horus)(이집트 신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을 말함)라 선언하고 공적 장소에 나타날 때에는 남장 왕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그녀의 통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온건하여 전쟁을 좋아하지 않고 타국과의 교역루트의 개발에 한 결 같이 힘을 쏟고, 한편 거대한 기념물과 여러 개의 신전 건설을 행하는 것이었다.
건설에 당해서는 그녀에게는 유능한 스텝이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센무도라는 대신은 수 십 개의 관직을 겸할 정도로 유능한 건축가로서 여왕은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있었다.
아마도 센무도가 없이는 어떤 건축 사업도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센무도는 젊고 미남이기도 하였으므로 여왕의 신하라기보다 그 관계를 지나서 남녀의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장대한 테라스가 있는 신전
왕위에 오른 그녀는 파라오가 되면 반드시 착수할 일대 이벤트 곧 왕묘를 만드는 이에 착수했다.
그녀는 적당한 후보지를 몇 군데 들어서 골라낸 다음 최후로 남은 후보지 시찰에 나가기로 하였다. 그녀가 주목한 장소는 왕가의 계곡 뒤쪽, 데이르, 엘, 바흐리(Deir el-Bahri)의 만형으로 된 지형이었다.
만형의 땅을 둘러싼 단애가 그녀의 마음을 잡았다. 그 단애는 70미터 이상은 있어서 단애절벽에서 거기서 앞은 사막으로 된 장소이다. 배로 시찰을 나간 여왕은 옆에 있는 건축가 센무도에게 말하였다.
“장려한 왕묘를 만들고 싶습니다. 게다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금후 천년만년 신들이 다스리는 신전으로 알맞은 성역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희망을 말해주신다면.” 센무도는 급경사인 단애의 사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3층의 테라스가 있는 신전이 내가 바라는 신전압니다. 앞에는 넓은 뜰이 있고 그 위에 다시 넓은 테라스. 그리고 신전입니다. 제일 위의 테라스의 안은 암굴신전으로 하고 싶습니다.”
여왕은 눈을 번쩍이며 말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폐하. 이 단애를 이용하면 장대한 왕묘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센무도는 크게 수긍하면서 말했다.
“신전 건설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까?” 여왕은 센무도의 눈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하비(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도래한 후가 좋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석재를 잘라 내거나 운반 작업에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센무도는 나일강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이리하여 대장제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사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장제전은 주로 석회암으로 만들어져서 배후의 바위산에서 잘라내었다. 화강암은 나일강의 상류에 있는 아스완에서 채굴되었다. 이런 때문에 나일강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특별히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배가 거기에 닿으면 수문이 닫혀서 안의 물을 떠올려 수위를 낮추는 것이다. 배의 갑판이 지면과 같아지면 석재를 운반한다.
거대한 화강암을 운반하기 위하여 길이 30미터 폭 25미터의 커다란 배가 몇 척이나 만들어져서 그것을 끌어당기는 소형 배도 많이 만들었다. 그것을 운반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석재를 잘라내는 장소에 가기까지만 해도 편도 4일이 걸린다. 이런 일만으로도 1000명이 필요했다.
여왕 장제전
장제전은 이루어진 후 벽화를 조각하게 하고 석상 등을 배치해 간다.
벽화는 여왕의 위업의 여러 가지와 탄생기록이 두루마리 식으로 그려졌다.
지금까지 역대 파라오라면 오랫동안의 전쟁 포로의 열이나 전쟁 광경, 전쟁의 공로 이야기 등이 자랑스럽게 그려질 터인데 평화를 사랑한 여왕답게 이런 전쟁 그림은 어디에도 없었다.
히에로그리프(hieroglyph、성각문자/聖刻文字、신성문자/神聖文字)라 하는 상형문자가 조각되었다. 히에로그리프는 표음문자이다.
제2층 신정의 벽화에는 국외의 통상 원정에 관한 기록이 그려졌다. 그리고 실물로서 홍해에서 가져온 미루라(수액을 태우면 향기로운 향기가 난다) 나무가 테라스에 심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대장제전 외에도 가르나크의 신전으로는 이집트 최대의 오베리스크를 세웠다.
카르나크 신전의 오베리스크
이 오베리스크는 2개가 하나의 대가 되어 화강암 재로서 높이 30미터, 무게 330톤이나 된다. 곧 두 개를 합치면 660톤이나 엄청난 무게이다.
이 두 개의 화강암을 상류인 아스완으로부터 잘라내어 운반하기만으로도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오베리스크를 잘라내는 데만도 7개월이나 걸리는 대공사였다.
오베리스크는 기념비로서 신전에 세워졌다. 표면에는 왕의 업적 등이 조각되었다. 이 오베리스크에는 하트셉수트의 치세 15년을 기념하여 그 표면에는 여왕의 업적, 이름 등이 조각되었다고 한다.
평화적 외교에 힘을 쏟았다.
하트셉수토의 위대한 하나의 업적은 평화적 통상원정이다. 여왕은 지중해나 홍해에 대함대를 파견하여 여러 나라와 교역에 힘을 썼다. 이집트에서는 빵, 맥주, 포도주, 과실 등을 준비하고 항해의 귀로에 이집트에 없는 귀중한 진품을 다량 가져 온 것이다.
특히 힘쓴 것은 푼트(홍해를 나가서 인도양으로 나간 지역에서 아라비아 및 소마리아 지방을 말한다)의 나라와의 통상으로 거기서 흑단, 상아. 유향, 몰약, 호박, 표범 가죽 같은 진품이 대량 수입되었다.
북방의 그레타에서는 아름다운 토기류, 시리아에서는 레바논 삼나무 같은 것이 수입되었다. 이 교역 모습은 대장제전의 제2신전 벽화에 그려져 있다.
몰약은 인도, 남아라비아, 동아프리카에서 산출된다.
“분트의 나라의 진품이 만재되어 상선의 하중은 대단히 무겁다. 몰약의 수지(樹脂), 향유, 손텔의 향, 눈 화장품, 승승이, 쌍이 열려서 이런 진품이 이런 정도로 대량 운반된 것은 어느 왕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라고 벽화는 말해주고 있다.
다른 벽의 그림을 보면 푼트의 지도자가 하트셉수트여왕 앞에 머리를 숙여서 순종의 뜻을 나타내고, 복종을 맹세하고 양국 간의 평화를 기도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보아도 그녀의 위업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의 파라오가 무력으로 침략하고 다른 나라에서 탈취해 온 것을 여왕은 평화적으로 부를 얻어 백성을 기쁘게 한 것이다.
신관들과의 균열
이리하여 통상원정대의 임무는 대 성공리에 끝났다. 그러나 치세가 19년째에 이르자 그녀에게도 종언의 위기가 다가왔다. 최초에 공사 간에 신뢰를 얻어서 때로는 여왕 자신이 애정마저 받아들였던 총신인 센무도가 그녀의 역린을 건드렸다.
센무도는 그녀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암살당한 것이다. 센무도는 여왕과 함께 데이르 엘 바흐리의 장제전에 묻히기로 허가했었는데 여왕은 그것을 금하고 다른 장소에 묻혔다. 그뿐 아니라 벽화에 그려진 센무도의 상을 벗기게 하였다.
도대체 센무도와 하트셉수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전에 조각한 벽화에는 여왕과 센무도, 그녀의 딸 네프루라 세 사람이 사이좋게 나란히 있는 그림마저 있었다. 애정에 금이 간 것일까? 아니면 센무도가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 후로도 불행의 고리는 이어졌다. 그 후 얼마 없어서 딸 네프루라 왕비가 병사한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하트셉수트는 딸 네푸루라와 공동통치를 하여 후에는 딸을 다음의 여성 파라오가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 계획이 진행되기 전에 네푸루라는 병사해버린 것이었다.
최초 도도메스 3세의 섭정으로부터 시작한 그녀의 통치는 어느 새에 도도메스 3세를 뒤로 하고 딸과의 공동통치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도도메스 3세는 20살이 되었었다.
이에 이르자 도도메스 3세를 옹호하는 신관들의 분노를 사서 하트셉수트는 표면상 도도메스 3세와의 공동통치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균열은 고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이집트의 내부 분열로 본 것일까 속령에서는 독립의 찬스가 왔다 하고 모반이나 반란이 일어났다. 시리아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누비아에서도 대규모의 반란이 이어서 일어났다. 어디까지나 평화주의를 관철하려는 그녀는 규모의 군대의 출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런 내우외환에 고민하던 중 그녀는 병사하였다. 통치가 시작되어 23년 후의 일이었다. 아마도 사랑하는 딸 네푸루라의 죽음이 그녀로 하여금 활력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벽화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녀의 사후 그녀에 관한 사적은 도도메스 3세에 의하여 깔끔이 삭제되었다. 그녀가 센무도의 이름을 벽화 초상에서 삭제하듯이 이번에는 그녀가 기념물에 새긴 이름이 삭제되었다.
도도메스 3세로서는 계모이고 의사가 굳은 여왕에게 그늘로만 내몰렸다. 무시되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의 기록을 말살한 것은 하트셉수트가 여성으로 파라오로 군림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신관 일파였을 것인가. 지금은 상세한 것을 모른다.
위대한 여왕의 사후 파라오가 된 도도메스 3세는 역대 파라오와 같이 강대한 군사력을 써서 이웃을 침략하는 행위를 개시했다. 곧 이집트의 평화외교는 23년간만 이어진 것이다.
그녀가 섭정을 할 때에는 어렸던 도도메스 3세는 이집트의 알렉산더대왕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각지의 원정을 되풀이 하였다. 이윽고 북은 유프라데스, 남은 나바다사막에 까지 이르는 총면적 64만 평방킬로미터라는 엄청난 영토로 제국을 확장하였다. 그것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평화주의의 반동이었던 것일까?
그녀가 일으킨 영향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관들 사이에 생긴 균열은 1세기 후 아마루나혁명이라는 형식으로 폭발하게 된다.
*아마루나혁명
아멘호뎁4세((Amenophis IV,재위1379-1362)는 종교세력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때까지의 신을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수도 아케도아덴을 건설하여 유일신 아돈 라의 신앙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아돈신의 사자라 하고 이구나톤((Akhenaten)이라 칭하였다. 아쿠나톤의 별명을 아마루나라 하고 이 시대를 아마루나시대라 한다.
생전 여왕이 특징을 나타내는 흔적
그 후 오랜 동안 하트셉수트 여왕의 묘도 그녀의 미라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다. 그런데 2007년 6월, 1903년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1874년 5월 9일 – 1939년 3월 2일)에 의하여 왕가의 골짜기의 작은 묘에서 발견된 신원불명의 미라가 실은 하트셉수트여왕의 미라였던 것이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다.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새겨진 카노핔 항아리(canopic jar=미라의 내장 등 인체의 조직을 담은 항아리)에 들어있는 어금니와 미라의 치경의 구멍이 일치한 데서 다시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진바 하트셉수트의 친족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공통 DNA가 인정된 것이다.
그녀는 생전의 신장은 165센티쯤의 큰 체격이었던 것 같다. 향년 50세였다.
만년에는 여러 가지의 생활습관 병으로 괴로워한 모양인데 치주염, 관절염, 당뇨병 등도 앓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직접의 사인은 치주염에 따른 발치로 인하여 감염된 균이 전신을 침범하여 패혈증을 일으켰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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