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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의 고전/장자 이야기 백 가지

제96화. 아는 것과 모르는 것(내편 제물론)

간천(澗泉) naganchun 2010. 1. 15. 05:23

 

제96화. 아는 것과 모르는 것(내편 제물론)

 

  묘고야산의 신인 중에서 설결이 그 스승인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만물이 모두 한 결 같이 옳다고 긍정하는 근원적인 도를 아십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왕예는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설결은 또 다시 “그러시면 모른다는 것만은 알고 계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욍예는 “그것도 모르지.”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설결은 “그러면 일체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계시는군요?”

 

그러자 왕예는 그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긴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너는 지나치게 판단에 집착하고 있는 모양이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말을 해보기로 한다. 대체로 인간의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실상은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른다고 단정한 것이 실은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시험 삼아 네게 물어보겠다. 사람은 축축한 곳에서 자면 허리를 앓아서 반신불수가 되고 말지만, 미꾸라지는 어떻더냐? 또 사람이 높은 나무에 올라가면 무서워서 덜덜 떨게 되지만 원숭이는 어떻더냐? 이 셋의 거처에 대해서 어느 것을 올바른 거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지만, 사슴은 들판의 풀을 좋아한다. 지네는 뱀을 진미로 알고 있고, 올빼미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맛에 대해서도 어느 것을 올바른 맛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있다. 원숭이는 편저라는 손이 긴 원숭이를 암컷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사귀며, 미꾸라지는 고기들과 어울려 논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가 사람의 눈에는 절세의 미인으로 보이지만, 고기가 이들을 보면 무서워서 물 속 깊숙이 숨어버리고, 새가 이들을 보면 놀라 하늘 높이 날아가며, 사슴이 이들을 보면 허둥지둥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 네 가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어느 것을 올바른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인의를 논하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 결국은 애매할 뿐 구분할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설결은 말하였다.

“선생님은 시비나 이해득실을 가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럼 지인(至人)은 원래 이해득실 같은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왕예는 대답하여 말하였다.

“지인은 영묘한 존재이다. 큰 계곡에 불이 타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큰 강물이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하지 못한다. 산을 갈라놓을 듯한 우레나 바다를 뒤집을 것 같은 폭풍에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지인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돌아 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 그의 몸은 생사를 초월해 있다. 하물며 하찮은 이해득실을 따지겠는가?”(내편 제물론)

 

  이 이야기에서 장자는 절대의 도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적 판단은 아무런 구실을 할 수 없고 지적 판단이란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일 수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옳다는 것이 그른 것일 수도 있고 그르다는 것이 옳은 것일 수도 있으며,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로운 것일 수도 있고,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로운 것일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지인은 일체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영묘한 존재로서 어떠한 위험스러운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우주 밖에서 노닐며, 심지어 삶과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자이므로 구구한 이해득실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설결은 도란 인간의 지적 판단 밖에 있는 것으로 지식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뛸 듯이 기뻐하며 설결의 스승인 포의자(蒲衣子=被衣)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는 이야기가 내편 응제왕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