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
인간에겐 잉태에서부터 이르는 곳마다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지 않은가 싶다. 출생, 질병, 입시, 취직, 결혼, 빈곤, 고민, 경쟁 등 도처에 벽과 부닥친다.
사르트르의 《벽》도 있고, 이시카와(石川)의 《인간의 벽》도 있고, 죄수에겐 ‘구속의 벽’이 있고, 대자연의 장벽도 있으며, 나에게는 ‘은혜의 벽’이 있다.
사르트르가 ≪벽≫을 통하여 실존을 말하고, 이시카와가 ≪인간의 벽≫을 통하여 교육과 사랑을 말하였지마는, 나는 내가 겪은 벽과 마주 앉아 벽으로 절연(絶緣)된 속의 참 나를 찾아본다.
나는 허공에 내 상념을 그리는 것보다, 내 시각의 종착점이며 사고의 파지장(把持場)인, 내가 거처하는 방벽과 더불어 나의 고민, 나의 사랑, 그리고는 나의 실존을 이야기하며 벽과 마주 누워 꿈을 꾸고, 나의 생활을 설계하며, 고등학교의 과정을 마쳤다. 이쯤이면, ‘벽’에 대한 지식은 어지간하다고 자신을 가져본다. 욕심을 부려서 대학이나, 석사, 박사, 그 쑥스러운 ‘벽(壁) 박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정도로 족하다. 아니, 벽에 혐오를 느낀다.
내 방의 벽은 전격술(電擊術)을 부리는 아내보다 낫고, 변절 많고 가식 많으며, 미지근한 연인보다 낫다. 피곤한 때 기대면 싫다 않고 피곤을 덜어주고, 고독의 벗도 되며, 내 얄궂은 상념을 파지시켜 주며, 때로는 잠을 재워주는 요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은혜롭다.
아마 나는 숙명적으로 벽과 친해야만 할 사람인가 싶다. 내 생명이 어머니의 자궁벽에서부터 싹터 났고, 벽에 기대어 서는 법을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 벽에게서 인간의 마음속에도 벽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왜 인간들은 서로 질시하고, 불신하고, 친소가 있게 되었는가? 누구에게나 벽이 있어서 서로 절연된 때문이리라.
인간은 지혜와 건강, 그리고 인내와 노력으로 대자연의 장벽을 헐어버리고 있다. 삼차원의 장벽을 넘어가는 인간의 모습…. 히말라야의 고지를, 극지(極地)의 빙판을, 그리고 깊은 대양을 정복하는 인간, 그 얼마나 용감하고 대담한가?
어디 그뿐인가? 사차원의 장벽을 헐어 버리려고 가가린, 그렌, 티토프, 카펜터, 니콜라이에프, 포포비치 등이 발을 내디디지 않았나? 태양계 우주 말고도 은하계에는 수많은 우주가 있다고 하니, 사차원, 아니 오차원이라는 장벽이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지혜와 용기를 시험하려는지? 그리고 과연 인간이 이 우주의 장벽마저 헐어버릴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인간을 겹겹으로 싸고 있는 벽은 헐어버리기를 바라지만 헐리지 않는다. 벽으로 공간을 구분하듯,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충돌점을 의미하듯, 인간은 제 각기 자기를 둘러싼 벽안에서 고독하게 이기적으로 주어진 자기의 삶을 살기에 바쁘고, 복잡 미묘한 마음의 벽들과 충돌을 면치 못하며 사는 게 아닌가?
원자물리학과 우주물리학이 등장하여 사차원의 공간을 응시하고, 고전물리학을 퇴장시키는데, 오늘도 소크라테스, 칸트, 헤겔, 그리고 니체와 키엘케골, 바울, 어거스틴, 파스칼 등 옛 사람의 생각을 더듬어야 하는 것은, 마음속에 겹겹이 쌓인 벽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방황하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행복을 찾는 인간에겐 자꾸 차원을 달리하여 무한 행복을 찾는 불만의 움직임을 그치지 못하고, 사랑만을 말하는 종교가 왜 살육의 전쟁을 부인하지 못하여 총을 겨누어야 했으며, 세계는 면면히 사상의 대립이 그치지 않는다. 이 얄팍하고 좁다란 가슴속에선 선과 악의 대결, 이성과 감성, 사랑과 미움의 갈등이 그치질 않아 불안하기만 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한 바울의 한탄이 아니 나올 수 없지 않은가 한다. 그래서 마음의 벽을 증오한다.
칸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한 것은 창공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라고 한 말과는 달리 우주로 뻗친 무한대의 장벽은 헐리어 가는데, 5척 단구(短軀) 인간의 무한히 깊고 깊은 마음의 벽은 헐어버리지 못한 채, 후손에 넘겨줄 수수께끼의 심연인가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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