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편애
안회(顔回)는 공자의 학문을 계승할 후계자로서 공자가 자식처럼 귀하게 여겼었다고 하는데 공자보다 30세가 연하였고, 자공(子貢)은 변설에 능하고 이재에 밝았으며 안회보다 1년이 연하였다. 그들은 거의 동년배의 문하생으로서 경쟁심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전문적인 분야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스승의 대하는 태도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계씨(季氏)정권에서 물러나 망명으로 천하유세의 길에 나섰을 때에 자공은 이재에 밝아서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경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동행했는데 자공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공자님은 자로(子路)나 안회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물론 당시에는 긴 여행을 하려면 위험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용감한 자로를 중히 여긴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안회에 대한 공자의 신뢰는 조금 과대평가처럼 보였다.
공자는 안회를 평가하여 “회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으로 끼니를 이어가며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못내 고생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회는 가난을 잊은 듯이 그가 즐겨하는 학문을 계속하고 있으니 참으로 훌륭하다.”(옹야11) 하고 절찬한 일이 있다. 청빈한 생활을 즐기는 회를 상찬한 말씀이다.
청빈한 생활, 이미 장사 재주를 가지고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공으로서는 맛볼 수 없는 생활이었고, 자공은 이 말씀을 괴롭게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衛)나라에서 진(陳)나라로 가는 도중 광(匡)이라는 곳에서 위난을 당한 일이 있었다. 체격이 훌륭한 공자의 모습을 본 광(匡) 사람들이 일찍이 이 땅에서 난폭한 짓을 저지른 양호(陽虎)라고 잘못 알고 그들 일행을 포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일행이 산산이 흩어지고 안회가 일행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일행은 그 안부를 걱정하였지만 공자는 몇 배로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수일 후에 안회는 공자 일행을 찾아 좇아 왔다. 그 때 공자는 안회를 부둥켜안고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하고 무척 반가워했다. 안회는 “스승님이 계신데, 회가 어찌 죽겠습니까.”(공자세가23, 선진22) 하고 대답하여 두 사람은 재회를 기뻐하였다. 자공은 생각하기를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여기서 공자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여행의 여비를 거의 부담하고 있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하고 분간을 못하였을 것이다. 공자의 편애함을 직접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공자님은 나의 돈만을 알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까지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패배감 속에 있는 어느 날 공자님은 안회가 없는 자리에서 자공에게 “너는 회와 네 자신을 비교할 때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을 하였다. 자공의 질투하는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말씀이었다. 자공은 속으로 공자님이야말로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이를 억누르고 애써서 겸허하고 냉정하게 “제가 어찌 안회를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공자님은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공야장9)고 덧붙였다. 자공이 어느 날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하시는 공자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공자에게 말하기를 “남이 내게 해서 싫은 것이면 나도 남에게 하지 않을까 합니다.”하고 인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였다. 그랬더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건 어려운 일이다. 너로서는 힘들 것 같다.”(공야장11)고 말하는 것이었다.
점점 공자님의 안회에 대한 평가는 높아 가는데 자공은 미흡함을 지적 받게 되어 매우 의기소침해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안회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가 죽은 후의 일이다. 안회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공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 때문에 “아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나를 버리셨구나.”(선진9) 하고 한탄하며 몸부림을 쳤다. 공자님의 평생에 이처럼 격한 감정의 표출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자의 한 사람이 이것을 지적하자 “내가 너무 슬퍼하느냐?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원통해 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원통해 하겠느냐?”(선진10) 하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안회가 가서 남은 제자들의 평가가 올라갔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제자들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옹야2) 하고 붇자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노여움을 갖는 일이 없으며, 똑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이 짧아서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그가 없는 지금은 아직 참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옹야2) 하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자는 때때로 안회와 자공을 비교 비평하는 말을 하는 일이 있었다. 선진편에는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는 거의 완전에 가깝다. 마음속에 아무런 사욕이 없이 텅 비어있다. 자공은 천명에 따르지 못하고 돈을 벌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먼 앞일을 내다보는 일은 자주 맞춘다.” 하고 말하여 안회는 완벽한 덕행의 우등생이고 자공은 돈벌이에 밝은 현실 공리주의자인 것처럼 평가하고 있다.
안회나 자공은 현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과연 그들에게 경쟁의식이라 할까 시기 질투가 있을 까닭이 있으랴마는 그들도 인간이므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그들도 예외가 아니라 생각된다. 그리고 아무리 군사부일체의 근원을 이룬 공문이지마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우열을 평가하는 공자의 태도는 현대의 안목으로 볼 때 과연 어떻다 해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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