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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26, 알렉산더 그라함 벨 이야기. (7/8)

간천(澗泉) naganchun 2024. 12. 24. 03:13

26, 알렉산더 그라함 벨 이야기. (7/8)

 

7, 가정생활

 

1877711, 벨 전화회사가 설립된 지 며칠 후, 메이블 허버드(1857~1923)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케임브리지에 있는 허버드 저택에서 열렸다. 벨은 신부에게 주는 결혼 선물로 새 회사의 주식 1,497주 중 1,487주를 메이블의 이름으로 전환했다. 이후 약 1년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이었지만, 벨은 수제 전화기를 챙겨 업무를 겸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구애를 시작했으나,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까지 청혼을 미뤘다. 전화기로 즉각적인 수익을 얻을 수 없었고, 1897년까지 벨의 주요 수입원은 강의였다. 메이블은 약혼 기간 중 벨에게 알렉(Aleck)’이라는 이름의 철자를 알렉(Alec)’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고, 1876년부터 그는 알렉 벨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다. 엘시 메이 벨(18781964)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길버트 그로스베너와 결혼했으며, 마리안 허버드 벨(18801962)'데이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다. 가족은 1880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거주했고, 이후 장인 허버드가 구입한 워싱턴 D.C.의 저택으로 이사했다. 1882년에는 벨이 직접 구입한 워싱턴 D.C.의 또 다른 저택으로 이주했다. 워싱턴 D.C.에 거주한 이유는 특허 관련 소송이 길어지면서 자주 법정에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1882, 벨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와 캐나다, 영국의 시민이었다. 1915, 그는 나는 두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외국계 미국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이 거주했던 스코틀랜드, 캐나다, 미국은 모두 벨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85, 벨 가족은 여름 별장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 벨 가족은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 섬의 작은 마을 바데크에서 휴가를 보냈다. 1886년에도 같은 장소를 방문한 벨은 브래스도어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1889, '더 로지(The Lodge)'라 불리는 통나무집이 완공되었고, 2년 후에는 연구소를 포함한 대규모 복합 건물이 되었다. 벨은 이곳을 고향인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를 기리며 베인 브레(Bain Bhreagh, 게일어로 "아름다운 산")’라고 명명했다. 이후 벨은 생애 후반 대부분을 워싱턴 D.C.와 베인 브레에서 보냈다.

벨은 실험에 몰두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베인 브레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부부는 바데크 마을 주민들과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받았다. 1917126, 핼리팩스 대폭발이 발생했을 때도 벨은 베인 브레에 있었으며, 부부는 핼리팩스 피해자 구호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