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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재일한인은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나

간천(澗泉) naganchun 2013. 9. 1. 09:19

 

재일한인은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나

 

 

오늘 2013년 9월 1일은 90년 전 1923년 9월1일 일본 도쿄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당시 도쿄에 거주하던 재일한인이 6,600 여명(일본 정부 통계, 최근 독일에서의 발표는 2만 3000여명이라고 알려지고 있다)이나 대량 학살된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이에 일본 교토 하나소노대학 교수 강재언(姜在彦)의 <재일조선인 도항사>에서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가>하는 연혁만을 발췌하여 싣는다. 참고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Ⅰ. 도항의 연혁

 

1. 제1단계의 시기(1910〜20년)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이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일본에 이주한 것은,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이 병합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도항사를 대충 구분하여 1910〜20년까지의 시기를 제1단계로 한다면, 이 시기를 특징지을 역사적 배경으로는 조선에서의 초기의 강권적 식민정책, 특히 헌병과 경찰의 폭력과 협박에 의하여 강제로 진행된 ‘토지조사사업’=토지수탈정책이 행해진 것이다. 그 결과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량으로 농촌에서 배출될 뿐 아니라, 조사사업의 산물로서 확립된 반봉건적 착취 관계는, 농촌에 주저앉아 있는 많은 농민들을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지주에 의하여 50〜70%의 소작료를 강요당할 뿐 아니라, 당시 조선총독부 세입의 대략 절반을 감당했던 지세 및 지세부가세는 명목상으로는 토지소유자인 지주에게 부과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작농민에게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 되어있었다. 더구나 지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던 고리대금업자가 농민들의 빈곤한 허점을 노려 무자비한 수탈, 토지․가옥 등의 차압, 몰수를 행했다.

더구나 이 조사사업기간 중인 1910〜15년 사이에, 일본인 토지소유자수는 2,254명에서 6,966명으로, 그리고 그 소유면적은 6만9,000정보에서 17만1,000정보로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일본 ‘국유’로 된 토지에서 소작료 수입의 연간 액은 200만여 엔에 미쳤다.

이러한 반봉건적(半封建的) 식민지적인 2중, 3중의 수탈 체계의 창출은, 농촌에 있어서의 근대화의 길에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고, 농민들의 심각한 생활 파탄을 초래했다. 농민의 프롤레타리아에로의 전환,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수반하는 농촌의 분화과정을 통하여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경향인데,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는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발전, 그에 상응하는 근대산업의 발생을 수반하지 않은 채로 일본 자본주의의 하나의 종속부분으로서 편입되는 조건 속에서, 그것이 급격한데다가 강권적인 형식으로 행해진 만큼, 농촌으로부터 배출된 그들을 국내에서 흡수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기반이 약하고, 갑자기 해외에로의 유민문제의 근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민문제의 일부분으로서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도항은, 일본자본주의의 강한 요구에 의하여 발생하고, 그 기구 속에 흡수되어 간 것이다.

1914년에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이 참전함으로써 아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참전으로 인한 전쟁의 재해를 전혀 받지 않고, 군수 붐의 물결을 타고, 일본자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하고, 자본이 소수 자본가에게로의 집중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대외 무역에 있어서 1914〜18년까지의 수출초과총액은 14억7,000만 엔에 미치고 있다.

국내 노동력의 부족과 저임금정책을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의 노동력의 수입에 본격적으로 나아갔다. 일본인 노동 브로커가 식민지 조선으로 손을 뻗치고, 갖은 감언이설과 사기를 희롱하면서 노동자를 모으는 데에 광분하였다. 노동자 모집의 난맥상에 식민지 당국마저도 묵인할 수가 없어서 1918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령 ‘노동자모집취체규칙(勞動者募集取締規則)’을 공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의 재일조선인 인구의 동태를 나타내면 다음의 표18과 같다.

 

표18 재일조선인 인구 동태표

연 차

연말 재일 조선인구

증가인구

1915

3,989

--

1916

5,638

1,649

1917

14,501

8,863

1918

22,262

7,761

1919

28,272

6,010

1920

30,175

1,903


일본 내무성 경보국 통계

 

자료에 따라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1904년 현재 일본에 재류한 외국인 1만5,497명 가운데 조선인수는 229명으로 되어있고, 1905년 현재로는 외국인 1만6,510명 가운데 조선인수는 1,944명으로 되어있다.

1899년 7월 28일의 외국인노동자입국제한법(칙령232호)에서는 그 제1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약 혹은 관행에 의하여 거주의 자유를 가지지 않은 외국인의 거주 및 영업 등에 관한 건

제1조 외국인은 조약 혹은 관행에 의하여 거주의 자유를 가지지 않은 자라 하더라도, 종전의 거류지 및 잡거지 이외에서 거주 이전 영업 기타의 행위를 할 수 있다.

단 노동자는 특히 행정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종전의 거류지 및 잡거지 이외에서 거주하거나, 또는 그 의무를 행할 수 없다.”

 

특히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행정관청이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를 원칙적으로 허가하지 않을 방침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재일조선인이라 하는 것은 대개 유학생이든지 친일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한법은 1910년의 조선병합과 동시에 조선인에게는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오사카부의 셋쓰방적공장(攝津紡績工場)이 이미 1910년 무렵부터 조선인노동자에게 눈을 돌려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 효시가 되는데, 역시 탄갱,공장 등이 노동 브로커를 통하여 조선인 노동자를 본격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의 일이다.

그 후 조선의 쌀과 조선인노동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여러 품목 중에서 가장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

다음으로 초기에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한 공장에 한해서(탄갱의 경우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니까 올릴 수 가 없으나) 그 공장 명과 사용 개시연월을 들기로 한다.

 

오사카부(大阪府)

셋쓰방적기스가와공장(攝津紡績木津川工場) 1911년

도오요방적상켕야공장(東洋紡績三軒屋工場) 1914년

수미토모주강소(住友鑄鋼所) 1916년 3월

아마가사키방적쓰모리공장(尼崎紡績津守工場) 1917년 6월

니이타조선소(新田造船所) 1917년 6월

셋쓰방적히라노공장(攝津紡績平野工場) 1917년 7월

후지나가타조선소(藤永田造船所) 1917년 7월

기비조선소(吉備造船所) 1917년 9월

 

효고현(兵庫縣)

셋쓰방적아카시공장(攝津紡績明石工場) 1912년 6월

가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 1914년 4월

고베제강소(神戶製鋼所) 1916년 6월

후쿠시마방적시카마공장(福島紡績飾磨工場) 1917년 5월

가와사키조선소분공장(川崎造船所分工場) 1917년

미쓰비시고베조선소(三菱神戶造船所) 1917년 5월

기시모토제정소(岸本製釘所) 1917년 8월

하리마조선소(播磨造船所) 1917년 8월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아사히화학공업주식회사(朝日化學工業株式會社) 1916년 1월

나이카이방적공장(內海紡績工場) 1916년 10월

와카야마방적공장(和歌山紡績工場) 1916년 11월

기요직포공장(紀陽織布工場) 1916년 11월

유라염료공장(由良染料工場) 1917년 8월

히노데방적공장(日出紡績工場) 1917년 9월

 

미에현(三重縣)

미에목재건류공장(三重木材乾溜工場) 1916년 1월

요시제면공장(吉製綿工場) 1917년 1월

도오요방적쓰공장(東洋紡績津工場) 1917년 7월

히라마쓰모직공장(平松毛織工場) 1917년 7월

오오하시주물공장(大橋鑄物工場) 1917년 7월

 

오카야마현(岡山縣)

도오요강성냥공장(東洋館燐寸工場) 1913년 11월

구라보오만주공장(倉紡萬壽工場) 1917년 7월

기비직물공장(吉備織物工場) 1917년 9월

구라보오다마시마공장(倉紡玉島工場) 1917년 11월

이시이직물공장(石井織物工場) 1917년 11월

출처 - 농상무성 공장감독관 요시사카슌조(吉阪俊藏) 『조사보고서』 (1917년11월)

 

이렇게 하여 1918년의 일본재류 조선인은 2만2,000명 남짓을 셀 수 있게 되었다. 노동 브로커에 의한 응모자만이 아니라, 연고관계에 따른 도항자도 점차 증가해 갔다.

그런데 1919년에 조선전토를 휩쓴 3. 1운동이 일어나고, 유혈 투쟁이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일본 관헌은 반일적인 혁명운동이 해외로 파급되는 것과 해외로부터의 혁명가들의 입국을 막기 위하여, 조선인 일체의 출입국에 엄중한 제한을 두는 조선총독부 경찰령 ‘조선인의 여행 취체에 관한 건’을 동년 4월에 공포하고, 조선을 봉쇄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제1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조선 외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자는, 거주관할경찰서(경찰 사무를 취급하는 헌병분견대를 포함함, 이하 같음) 또는 경찰관주재소(헌병주재소를 포함함, 이하 같음)에 여행 목적 및 여행지를 계출하고, 여행증명서의 발급을 받아 조선 최종 출발지 경찰관(헌병을 포함함, 이하 같음)에게 이것을 제출해야 한다.

(2) 조선 내에 여행하고자 하는 자는 앞에서 말한 증명서 또는 재외제국공사관의 증명서를 조선 최초의 도착지의 경찰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이 엄한 제한에 따라 일본으로 도항하는 경향은 일시 소강상태를 나타내게 되었으나, 1922년에 그것이 폐지됨과 동시에 도항자수는 급속히 증가하고, 제한 전의 연간 증가 인구는 6,000〜8,000명을 기록하였으나, 제한 후에는 2만〜3만 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선 농촌에서 과잉인구가 발생하는 것은 조선에서 보편적인 유민현상의 근원이 되었는데, 과잉인구의 배출구는 주로 일본 및 북방대륙 방면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지리적인 관계로 남부조선 출신자는 일본으로의 도항자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역으로 북방대륙으로의 이주자 가운데는 북부출신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1923년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으로 유입하는 조선인의 출신지가 판명되는 도항자수 7만2,815명 중에 (당시의 재일조선인총수는 8만0,617명) 경상남도 출신자는 2만8,628명, 경상북도 출신자는 1만1,404명, 전라남도(제주도를 포함) 출신자는 1만8,050명으로 되어서 이 3개도 출신자만으로도 전체의 약 8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조선총독부 경보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10〜22년까지 간도(間道) 방면으로의 이주자총계 25만1,086명 중(내역=서간도 10만2,790명, 북간도 9만8,797 명, 기타 주로 시베리아 4만9,317명) 함경북도 출신자는 10만2,926명, 함경남도 출신자는 1만8,495명, 평안북도 출신자는 4만9,678명, 평안남도 출신자는 1만4,656명으로 되어서, 북조선 4개도 출신자만으로도 전체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일본이 러시아에서의 10월 혁명에 무력 간섭할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한 제11사단사령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1923년 3월 현재) 그 주둔지구내에 살고 있던 조선인수 4만3,881명 중에 함경북도 출신자는 3만5,594명, 함경남도 출신자는 5,726명으로 되어서 이 2개도만으로도 전체의 9할 남짓을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상 숫자를 들어서 설명한바와 같이, 비교적 남부조선 출신자가 일본으로의 도항자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러한 경향은 도항사 전 과정을 통하여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재일조선인의 도항사를 조선본토에서의 보편적인 유민문제의 일부로 생각하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제2단계의 시기(1921〜30년)

3․1독립운동 이후 일본 식민지 정책은 새로운 변모를 이루었다. 종래의 무단정치를 바꾸어 ‘문화정치’의 간판을 걸고, 조선 민족 내부에 매판세력을 부식하기 위하여 회유정책을 취함으로써 민족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소위 동화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눈에 띄는 경제정책으로는 무엇이라 해도 ‘산미증산계획(産米增産計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농업을 미곡 단작형(單作型) 농업으로 바꿈으로써 일본의 저임금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저미가정책을 지탱하고, 그러기 위하여 조선을 식량공급지로 만들어서 1918년의 ‘쌀 소동’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일본의 식량 위기를 구(救)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 계획은 1920년에 시작되어 15년간에 1억6,800만 엔의 자본을 수리시설 및 토지개량에 쏟아 부음으로써 920만 석의 미곡 증산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925년에 수정되어 그로부터 12년간에 3억2,500만 엔의 자본을 투하함으로써 816만 석의 미곡 증산을 예정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 현상 면만을 보면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파 들어가서 내용을 보면, 결국 조선 농업에 대한 일본인 자본의 지배권을 내세워 철저히 조선 농업을 일본자본주의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20년대 후반기에는 이미 일본인 및 토지회사를 비롯하여 은행 기타 금융기관에 저당 잡힌 토지를 포함하면, 일본인 자본은 조선의 전경지면적의 약 8할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지배. 집중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 다음의『동아일보』(1929년 2월 1일) 지상의 기사는 그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기성 수리조합의 실정은 우리로 하여금 전율할 만한 것이 있다. 곧 기성 수리조합의 현황을 보면 수리조합지역의 조선인 토지는 거의 전부가 수리조합 곧 일본인 소유로 되어있다. 그 경로는 대개 너무 많은 수세부담과 조합 측의 계획적인 간계에 의하여 빈약한 조선인 토지소유자는 하는 수없이 헐값으로 팔아넘기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다.”

 

표19 조선 미곡 생산량과 수출량 비교

(단위=100만석)

연 차

생산량

수출량

조선인 1인당 소비량

 

 

 

1918

13.7

2.2

0.68

1924

15.2

4.6

0.60

1931

19.2

8.4

0.52


조선총독부『미곡요람』에서

 

그런데도 미곡생산량의 증가는 이 시기에 있어서 산술급수적으로 증대한 대일 수출량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결과 조선인 1인당 소비량은 해마다 낮아져서(표19참조) 만주의 좁쌀을 수입하여 보충하였던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없어, 일본 경제는 만성적인 불황에 빠졌다. 일본 자본의 대조선 진출이 눈에 띄게 늘고, 특히 조선국내 시장을 목표로 하는 경공업으로의 자본 투자가 왕성해졌다. 1929년 현재의 조선공업자본을 민족별로 보면, 일본인 자본이 62.4%인데 대하여 조선인 자본은 6.2%,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동 투자가 30.8%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극히 일부의 매판자본을 제외하여 영세한 민족기업은 대 파탄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특히 농촌으로부터 배출되는 잉여인구가 국내에서 수용될 수 있는 꽤 넓은 기초를 낳은 것이 되지만, 과잉인구의 배출은 그 틀을 넘어서 급템포로 진행되고 있었다.

 

표20 1925년도 이농인 상황

(단위=명)

국내 노동자로서

69,644

일본으로

25,308

상업으로

23,725

공업, 잡업으로

16,839

일가 이산

6,835

시베리아로

1,090

기타

3,499

150,112


김한주(金漢周)『조선에서의 일제의 토지수탈정책』에서

 

앞의 표20은 중국동북부(만주)로의 이주자가 항상 이농한 자 가운데서 해외 이민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동북부 지방으로의 이주자가 나타나 있지 않은 등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농민 생활의 심각한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1927년 4월 14일부『동아일보』는 간도 방면으로 향하여 “원산을 경유하여 조선을 떠나는 동포가 지난 3월 한 달간에 2만 명 이상에 달했다”고 보도하고,『중외일보』(동년 3월 24일)는 역시 간도로 향하는 이재영(李載永)이라는 농민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싣고 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살아갈 길이 없다. 또 자녀들을 공부시킬 수도 없다. 학교비용을 징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생도로부터 월사금이라든지 장려비 등을 징수하고 있다. 만일 이것을 납부하지 않으면 1개년에 몇 번이라도 수업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침내는 월사금을 납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재를 차압당하게 되고……. 우리들은 하루 한 끼를 때울 수도 없고 빈사상태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라고 알지만, 하는 수 없이 납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단지 아사를 면할 길이 없는가 하고 간도로 향하고 있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봉황성(鳳凰城)인데, 과연 그 곳에 닿을 수 있을는지 어떨지 모른다.”

 

이러한 국내사정과 인민생활의 실상을 반영하여 일본 도항자수도 여전히 상승하고 있다.(표21참조)

 

표21 재일조선인 인구 동태표

구분

연차

연말 재일

조선인인구

증가인구

1921

35,876

5,693

1922

59,865

23,989

1923

80,617

20,752

1924

120,238

39,621

1925

133,710

13,472

1926

148,503

14,793

1927

175,911

27,408

1928

243,328

67,417

1929

276,031

32,703

1930

298,091

22,060


일본 내무성 경보국 통계에서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일본경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 심각한 불황에 빠지고 있지만, 정부는 소수의 독점자본에 대한 재정적구제책을 취하면서도 대다수의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이것을 방임하여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1923년의 ‘산업합리화’ 정책은 소수자본의 독점적 지위를 세우는 데 봉사하였다. 그 결과 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가두에 넘쳐나고 실업문제는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인의 도항을 제한한 1919년의 조선총독부 경찰령을 1922년 12월에 폐지하고, 자유도항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조선인 노동자를 무제한으로 일본 노동시장에 도입함으로써 실업노동자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고, 독점자본의 뜻대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함으로써 공황의 피해를 노동자 측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일본 노동자보다 훨씬 낮은 저임금인 타민족 노동자를 도입함으로써 막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한 일본 노동운동의 창끝을 민족 배외의 방향으로 돌리려는 반동적 의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일본 내무성 경보국 및 사회국을 비롯한 여러 기관이 재일조선인의 실태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있는데, 이 공표 자료에는 상투적으로 일본노동자 실업문제의 근본 원인이 조선인 도항자에 있다고 단정적인 중상을 휘두르고 있다.

앞에서 러시아 10월혁명에 대한 무력행사를 위한 시베리아 출병은 소비에트 적군의 저항과 일본 국내에 대두하는 민주세력의 반대로 1922년 11월 철수하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그 반동의 창끝은 과연 23년 9월 1일의 관동대진재를 계기로 하여 국내로 돌려졌다. ‘문화정치’의 간판을 짊어지고 조선총독 사이토미노루(齋藤實)의 정무총감으로 부임하고 있었던 미즈노렌타로(水野鍊太郞)는 그 후 가토오(加藤) 내각의 내상이 되고, 9월 2일에 성립한 야마모토(山本) 신내각에도 내무대신 사무관장으로서 남았었는데, 대진재가 발생함과 동시에 그는 그 직권을 이용하여 재일조선인에 대한 대학살을 지령하였다. 헌병, 경찰, 소방단, 우련대(遇連隊) 등에 의하여 학살당한 조선인수는 6,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전투적 혁명투사를 학살한 가메도(龜戶)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22년 일본공산당이 성립한 이래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 정책과 불가분의 연결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반동 층은 파시즘에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일관하여 민족 이간 정책을 추구한 것인데, 일본의 계급운동이 반제. 반전 투쟁으로 조선의 민족 해방 운동과 연대성을 점차로 굳히기에 이르러서, 조선인의 도항에 대하여 새로운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1925년 10월부터 이 도항저지제도가 부산항에서 실시되어, 당시의 경상남도 경찰부의 조사에 따르면, 동 10월부터 1927년 말까지의 사이에, 도항을 저지당한 자는 8만3,477명을 헤아리고, 도항자수는 24만6,809명으로 되어있다. 도항을 저지당한 자 가운데는 가재도구 일체를 팔아넘기고 맨몸인 자가 많고, 그들은 국내의 도시를 떠돌거나 혹은 밀항을 기도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도 경무부로 보낸 1928년 7월 24일 부 통달은 도항을 허가할 자의 기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취직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자.

(2) 선비, 차비 기타 필요한 여비를 제외하고 60엔의 여유가 있는 자.(출발지에서는 목적지까지의 소요여비 예상액과 준비금 10엔과의 합계액 이상을 가지고 있는 자일 것)

(3) 모르핀 주사 상습자가 아닐 것.

(4) 노동 브로커의 모집에 응하는 도항자가 아닐 것.

 

만일 이 기준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도항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생활 빈곤자의 도항은 없어질 것이다. 사실 당시의 일본 경제상황은 극도의 불경기에 휩싸여 조선인 노동자의 유입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였다. 그러나 이 제한이 주로 노리는 것은 그 기준보다도 그 수속의 문제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제한이 행해진 시기에 있어서의 도항자 가운데는 여전히 지참금을 가지지 아니하거나 또는 조금밖에 가지지 아니한 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속이라는 것은 도항희망자는 관할 경찰주재소로부터 부산수상서에 가는 ‘소개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고, 소개장을 발급한 주재소에서는, 그때마다 수시로 경찰서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있었다. 결국 도항자에 대하여 엄한 경찰의 감시와 통제가 붙어 다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수속은 그 후에도 계속 실시되었다.

 

표22 재일조선인 지역분포(1921년 현재)

오사카부(大阪府)

21,984

히로시마현(廣島縣)

3,219

후쿠오카현(福岡縣)

12,276

니가다현(新潟縣)

2,884

효고현(兵庫縣)

5,502

아이치현(愛知縣)

2,882

도쿄부(東京府)

5,499

나가사키현(長崎縣)

1,750

야마구치현(山口縣)

4,872

시스오카현(靜岡縣)

1,426

교토부(京都府)

4,115

가라후토(樺太)

1,268

나가노현(長野縣)

3,985

와카야마현(和歌山縣)

1,095

기후현(岐阜縣)

3,495

도야마현(富山縣)

1,001

홋카이도(北海道)

3,286

(1,000 명 이하는 생략)


오사카시 사회부 조사에서

 

그리하여 이 단계의 시기에 이르러, 탄갱 및 공장지대, 토목공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 취락이 점점이 형성될 뿐 아니라, 그 분포는 일본의 각 도, 부, 현(道府縣)에 미치고 1,000명 이상의 거주자가 있는 지역만도 표22와 같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인 노동자 문제를 비롯하여 그 정치적 동향은 간신히 뭇 사람의 눈을 끌게 된 것이다.

 

3. 제3단계의 시기(1931〜38)

1920년대에 만성적인 경제공황으로 고민하고 있던 일본경제는 1929년이 시작되자 세계경제공황의 와중에 휩쓸렸다.

30년대에 들어가자 국수주의 우익테러가 자주 일어나고, 일본 국내의 파쇼적 지배체제는 급템포로 굳어져 갔다.

이에 따라서 공황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대륙침략에서 구하는 전쟁정책이 빈틈없이 추구되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32년에는 ‘상해사변’이 발발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함으로써 침략을 위한 완전한 ‘자유행동’을 명백히 표명했다. 그래서 마침내는 1936년 히틀러 독일과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고, 동서에 있어서의 반소, 반공의 파쇼진영을 정비하면서 1937년에는 중국 인민에 대한 대규모 무력 침략으로 내달았다.

이러한 전쟁 정책의 추진에 수반하여 전시에 있어서의 국제봉쇄에 대비하여 자급경제체제-소위 ‘일(日)․만(滿) 불럭 경제’를 시끄럽게 부르짖고, 대륙과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조선의 전략적 지위는 점점 중요하게 되고, 소위 ‘병참기지화’ 정책이 30년대에 있어서의 식민지 정책의 기본방향이 된 것이다.

1930년을 전후해서 일본 농촌을 휩쓴 농업공황은 일본자본주의를 위하여 저미가의 식량공급을 목표로 하여 입안된 ‘산미증식계획’에 중대한 타격을 주어 결국 일본 농업공황의 여세는 가장 심각하게 조선농민에게 덮어씌워졌다. 그래서 산미계획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소위 ‘북양남면(北羊南綿)’정책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소위 ‘준전체제(準戰體制)’ 속에서 조선농촌에 강요한 새로운 임무가 되었는데, 그것이 갖는 의미는, 일본공업 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방적공업이, 그 원료인 생사 외에 원면, 양모 등 어느 것이나 거의 전부 외국에 의존해 왔음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멋대로의 정책전환의 타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것은, 경영의 내용 전환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영세농민이다. 농민들의 반항이 소작쟁의 형식에서, 1930년을 전후해서 단천(端川), 어대진(漁大津), 명천(明川), 전라북도 각지, 기타에서 자주 일어난 농민봉기로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심전개발’ ‘자력갱생’ 등 내용이 없는 정신주의와 내핍을 강제한 소위 ‘농산어촌진흥운동’ 같은 것은 이러한 농민의 반항에 대한 속임수대책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앞에서 말한 농업공황과 그에 수반하는 제멋대로의 정책전환이 얼마나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지는 1930〜32년까지의 3년간만으로도 농촌의 부채액이 4만3,600엔에서 8만 엔으로 부풀어 오른 것, 소작인 및 화전민이 28만9,000호나 증가한 것으로도 짐작이 갈 것이다.

 

표23 재일조선인 인구 동태표

인구

연차

연말재일

조선인구

증가 인구

1931

318,212

20,121

1932

390,543

72,331

1933

466,217

75,674

1934

537,576

71,359

1935

625,678

88,102

1936

690,501

64,823

1937

735,689

45,188

1938

799,865

64,176


일본내무성 경보국 통계에서

 

조선 국내의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의 일본 도항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표23 참조)

표23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1932년부터는 실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바로 우리들은 조선에서의 다음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당시 빈곤으로 인하여 과잉인구의 배출이 얼마나 격심했는가를 추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병참기지화’ 정책의 추진에 수반하여 공업 이식, 특히 군수적인 중화학공업의 진출이 성행했다. 그 결과 공업구성에서 보아도 1936년에는 중화학공업 34%, 경공업 66%였던 것이 1939년에는 전자가 47%, 후자가 53%로 큰 변화를 나타내었다. 노동자수에 있어서도 공장, 광산노동자만으로 1931년에는 14만2,67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9만3,315명에 이르고 있다.

또 ‘만주’→‘동해(일본해)’→‘이일본’(裏日本=동해 연안의 일본북부)을 연결하는 중계지인 ‘북선개척(北鮮開拓)’이 ‘병참기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추진되고, 그 지역에 중화학공업, 광산으로의 노동자의 이동은 물론, 도로 및 임야개발, 축항 확장 및 만포선, 나진철도 등의 국경선 부설공사를 위해서 북조선 각 농촌만이 아니라 남부조선까지 손을 뻗쳐 노동자의 이동 소개사업을 특히 1934년부터 왕성하게 행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의 노동력의 흡수가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의 도항자는 그 희망자의 3〜4할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 도

도항출원자

저지당한 자

도항자

도항자율

1932

4만8,449

3만1,789

1만6,660

34.8%

1933

5만8,772

3만7,799

2만0,973

35.7%

1934(6월까지)

4만0,968

2만5,539

1만5,539

37.7%


 

더구나 도항을 저지당한 자 가운데는 밀항을 기도하여 “밀항하여 오는 조선인은, 밀항함에 즈음하여 대개 30엔 내지 40엔 정도의 돈을 밀항 브로커에게 주는 모양입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의 집과 집터, 논, 기타를 팔아서 맨몸으로 일본으로 밀항해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붙잡혀서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집과 집터, 논과 밭을 모두 팔아버렸기 때문에 참으로 맨몸이 되는 것입니다.”(일본사법성 조사과 ‘세태조사자료’ 제26호 ‘후쿠오카현 거주 조선인의 동향에 대하여’)(1939년)

다시 이 시기에 있어서의 일본정부의 조선인 대책에 대하여 적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종래 일본정부로서는 재일조선인에 대하여 거의 방임상태였다. 관동대진재 이후에 조선인 문제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어서, 1924년에는 오사카에, 25년에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과 고베(神戶)에, 각각 소위 ‘내선융화(內鮮融和)’의 ‘내선협회(內鮮協會)’가 설립되고, 기타 약간의 사설 민간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껏해야 ‘내선융화’의 이름을 팔아서 보조금을 노리는 부랑자적 매판분자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34년부터 일본 내무성 사회국, 경보국이 주축이 되어서(1938년부터는 후생성에 이관) 척무성(拓務省), 문부성, 조선총독부와의 긴밀한 연결을 바탕으로 재일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동화를 기조로 하는 ‘협화사업(協和事業)’을 추진하고, 1936년에는 처음으로 5만 엔의 정부예산을 계상하게 되었다.

덧붙여서 ‘협화사업’의 취지에 관한 일본내무성 통첩(1936년 8월 31일)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 반도인에 관한 문제가 점점 빈번해짐을 더해가는 정세 및 그 원인을 비추어보아, 동화를 기조로 하는 사회시설의 철저강화를 꾀하고, 그것으로써 국민생활이 함께 어울려 조화하는 데에 이바지하며, 공존공영의 실을 기하는 데 있음.”(밑줄은 필자)

 

이 방침에 따라 각 지방청에서는 학무부 사회과와 경무부 특고과(경시청의 경우는 내선과), 두 과의 연계 하에, 그 어용 외곽단체가 설립되었다. 오사카부협화회(大阪府協和會), 가나가와현내선협회(神奈川縣內鮮協會), 효고현내선협회(兵庫縣內鮮協會), 나가사키현내선협회(長崎縣內鮮協會), 도쿄, 교토, 아이치, 히로시마의 각 협회를 비롯하여 1936년부터 37년에 걸쳐 주요한 30개 단체가 조직되었다.

또 그 하부의 조선인 거주 지역에는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을 물심양면으로 일본화하는 운동으로서 교풍사업(矯風事業)을 행할’ 소위 ‘교풍회(矯風會)’가 협화회의 지부로 만들어지고, 경찰서 관구를 그 사업구역으로 하여 재일조선인의 일체의 동향을 모조리 조사해 올리도록 되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의 ‘협화사업’에 따른 관제적 파쇼조직은 재일조선인의 모든 거주 지역에 그물눈을 펴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 정책에 그들을 동원하기 위하여 이용하였다.

 

4. 제4단계의 시기(1939〜45년)

중일전쟁은 중국인민의 끈질긴 강한 저항을 당하여 장기전으로 화했다. 전쟁의 장기화와 전선의 확대에 따라 일본 국내의 청장년이 대량으로 전선에 동원되고, 전시산업에서의 노동력 부족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1941년부터의 태평양전쟁의 개시는 그에 박차를 가했다.

그 위에 조선에서도 대륙과 연결된 입지적 조건으로 대륙병참기지정책이 일층 강화되어, 전시 산업에 대량의 노동력이 흡수되었다. 농촌에서 자연히 유출되는 노동력만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노동력 동원을 위한 강제적 수단이 취해지게 되었다.

1925년 이래 실시되어온 일본으로의 조선인 도항 제한 방침은, 1939년 7월 일본의 내각기획원의 노무동원계획에 따라 해소되고, 그에 대신하여 일본으로의 강제적인 ‘노무공출(勞務供出)’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노동력의 새로운 공급처로서 학교 졸업자, 취학 중인 학생, 무직자, 현존하는 노동자(전시 산업으로의 직장 전환)에 더해서 특히 탄갱을 비롯한 중노동 부문으로 조선인의 이입이 예정되고 있었다. 이 노무동원 계획은 1942년 5월에는 ‘국민동원’으로 개칭되고, 그 대상도 한층 광범해져서 새로 죄수, 포로, 중국인 노동자의 이입 등이 예정되었다.

재일조선인을 가지고 전시산업 특히 탄갱에서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대책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곧 1937년 말에 각 도, 부, 현, 지사에게 보낸 일본내무성 사회국장 발 통첩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는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로 하여금, 취업 상태가 바람직하지 않은 자(실업등록자를 포함)가 있는 지방에서는 차제에 이들을 극력 석탄산에 소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재일조선인의 전시 산업으로의 동원과 아울러서 앞에서 말한 내각기획원의 계획에 기초한 조선 본토로부터의 ‘노무공출’은 1939년 7월의 내무, 후생 양 차관 명의의 통첩에 따라 구체화하고, 동년 9월부터 제1차 징용노동자의 이송이 행해졌다. 그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재일조선인 인구수는 표24, 징용노동자수는 표25와 같다.

 

 

표24 재일조선인 인구동태표

연차 인구

연말재일 조선인 인구

증가인구

1939

961,591

161,726

1940

1,190,444

228,853

1941

1,469,230

278,786

1942

1,625,054

155,824

1943

1,882,456

257,402

1944

1,936,842

54,387


내무성 경보국 통계에서

 

표25 일본도항 조선인 징용노무자수

연 차

합 계

탄 갱

금속산

토건업

공장을 포함한

제 산업

1939

38,700

24,279

5,042

9,379

---

1940

54,944

35,431

8,069

9,898

1,546

1941

53,492

32,099

8,988

9,540

2,865

1942

112,007

74,576

9,483

14,848

13,100

1943

122,237

65,208

13,660

28,280

15,089

1944

280,304

85,953

30,507

33,382

130,462

1945*

6,600

1,000

--

2,000

3,000

1939-45

667,684

318,546

75,749

107,327

116,062


(주) *표는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의 추계.

후생성 노무국에서

 

그러나 이 67만 명에 가까운 징용노동자수도 동원계획 숫자의 대략 73%에도 차지 않는 것으로, 그 예정숫자는 더 큰 것이었다.

그런데 표25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선인 징용노동자의 약 반수에 가까운 인원이 탄갱으로 돌려진 것이다. 전시 중 탄갱에서의 돌관 작업이 기계력을 이용하기보다도 원시적인 노동력의 강화로써 강력히 추진되어, 그에 수반하는 노동안전장치가 되어있지 않은 데서 오는 위험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를 가능한 대로 이 부문에 넣은 것이다. 죽음의 상인들은 노동자의 생명까지도 희생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석탄통제회의 보고서의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이해될 것이다.

 

“항공기 공업을 비상하게 강조한 때문에, 갱목이나 폭발약이나 중유나 비품 등의 부족이 노동력 부족에 수반되었다. 소집되거나 입대하는 자 중에서 점점 많은 수가 숙련된 청년이고 탄갱노동에서 가장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노동일과 노동시간의 증대에 따르는 피로, 그리고 그 피로의 누적에 따르는 사고의 증대와 노동성과의 감소는 지하노동에 대한 악감정을 일본인에게 안기게 해버렸다. 이 이유 때문에 조선인 및 중국인 노동자가 이입(移入)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 노동자의 대량을 강제적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각 탄갱마다 행해졌는데,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조선인 노동자의 탄갱에서의 비중이 증대됨에 따라, 그들은 새로운 불안에 빠지게 되어버렸다. 표26은 일본의 탄갱에 있어서의 조선인 노동자의 비중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전쟁이 가열해짐에 따라 급속히 증대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실로 35〜40%의 비중을 차지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중대한 것은 탄갱에서의 중핵적인 갱내노동자에 이르러서는 평균 6할, 때로는 7할의 고율을 차지한 것이다.

 

표26 탄갱에서의 조선인노동자의 비중

연 차

%

1937

2.8

1938

3.2

1939

3.4

1940

10.7

1941

15.8

1942

18.4

1944.4

3540


1942년까지는 석탄통제회조사,

1944년은『동양경제신보』(1944년 2월호)에서

1943년 3월 말 현재의 후쿠오카 광산감독국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채탄량(採炭量)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그 관내 탄갱에서(1936년 현재 후쿠오카현 탄갱 채탄량은 일본 본토 전 채탄량의 53.2%) 조선인 탄갱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22.8%가 되었고, 갱내 노동자는 29.8%, 특히 중요한 채탄부의 비중은 46.8%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인 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파쇼적인 통제는 점점 엄해지고, 군대식으로 조직된 단체 행동에서 이탈되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용단체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가 조직되어서 조선인 노동자의 일거일동에 대한 특고(特高)의 감독이 엄중히 행해졌다,

조선인 징용노동자의 경우, 그 계약기간은 2개년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들이 만기가 되었을 경우, 그 능률은 숙련공의 80%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1기 징용자의 만기를 맞은 1942년에는 노동수급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그들을 더 붙잡아두기 위한 갖은 술책이 취해졌는데, 3년 이상 이 군사감옥 같은 강제노동에 남을 사람은 없었다. 그에 따라 비협력적인 노동자는 일반 노동자와 격리시켜 일정한 제제가 가해졌다. 어느 광업소의 소위 ‘불량자’를 수용하는 ‘청심료(淸心寮)’의 예를 들면 그 수용인원 299 명 중 수용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도주벽 209, 포행 6, 태업 28, 소행불량 11, 선동벽 17, 불순종 4, 규칙무시 3, 도박상습 18, 도벽 7

 

결국 ‘불량자’라 일컬어진 자의 대부분은 노예노동에 대한 소극적인 형이었지만, 저항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조선인 노동자의 탈주, 태업은 전시 노동력의 수급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일으킨 것이다. 표27은 조선인 노동자를 대량으로 이입한 3개의 탄갱 지역에서의 이동조사인데, 결국 3지역 평균인 현재 보합비율이 46.4%인데 비하여 감모비율은 53.6%의 고율에 이르고 있다. 그 속에서 특히 탈주자의 비율이 높은 것이 두드러진다. 소극적인 형태이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러한 저항은 전시 산업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표27 이입 조선인 노무자 이동 조사 (1942년 10월 말 현재)

지방별

이입수

줄어든 비율

잔여, 10월

말일 현재

비율

도주

의병

송환

만기

귀국

사망

기타

 

 

%

%

%

%

%

%

후쿠오카(福岡)

-

44.6

3.5

3.4

0.5

6.9

41.7

죠반(常磐)

-

34.2

9.6

11.6

0.8

2.8

41.0

삿보로(札榥)

-

15.6

4.5

15.8

2.1

2.5

59.5

합계

-

35.6

4.3

7.3

0.9

5.5

46.4


(주) 본 조사는 1939년 10월 이후, 1942년 10월 말에 이르는 석탄광업의 이입총수에 대한 동태,

마에다하지메(前田一) 저 『특수 노동자의 노무관리』에서

 

어느 일본인 교사는 학도 동원된 고등학교 시대의 회상기 가운데, 조선인 징용공의 생생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4년, 내가 학도근로보국대의 이름으로 도야마현 사사쓰(富山縣笹津)의 일본마그네슘 도야마공장에 동원되어있던 무렵, 우리들 문과생 친구들이 차례차례로 군대에 소집되어 간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북조선에서 징용공이 200명 정도 들어왔다. 당시 학생은 그 부문에서는 15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직한 말로, 나는 조선인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전부는 믿지 않아도 권력자의 유언비어가 우리들의 머리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것이다.

눈이 6척이나 쌓이는 산간부의 공장에 그 사람들이 도착한 때의 인상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군의 흰 샤쓰와 아래 바지만 입은 모습으로, 15, 6세에서 40세를 지난 것 같은 잡다한 사람들이, 일본인 감독에 인솔되어 들어왔다. 이 사람들과 우리들은 그날부터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일본어는 거의 말하지 못했다. 보통학교를 나온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말을-손짓 몸짓으로-해나가자 그런 것을 알았다. 습관이 달라서 우리들이 어른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아내가 있는가 하고 묻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선 사람들은 공장의 일본인 감독과는 적대시하게 되어갔다. 그러나 함께 농축 가마를 휘두르고, 함께 보일러를 때던 우리들과는 은밀히 정이 돋아났다. 내가 지금도 조선어의 아리랑을 알고 있는 것은 그때 배운 것이다. 우리들도 일본 동화를 가르쳐주었다.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는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의 야식권이 이용되고, 담배가 없어진 우리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패드(담배 상표)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감금되고 있었다. 현금은 한 푼도 지니지 못한다. 숙사(원래의 유곽)로의 왕래는 줄을 짓고, 감독이 따랐다. 그러나 그 속에 어디서인지 정보가 흐르는 모양이다. 6월, 내가 소집되기 직전에 한 사람의 조선인이 나에게 ‘일본이 지고 조선은 독립한다.’고 말해주었다. 이 기분은 사람들의 기분을 밝게 해주었다. 반대로 지금까지 뽐내고 조선인을 때리던 계장들을 불안하게 했다. 계장은 나에게 ‘야근에서 잘 때는 목을 문지르고 잔다’고 말하곤 했다. 또 ‘일본이 지면 이 녀석들은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 때는 공장 한 구석에 몰아넣어 기관총으로 모두 죽이기로 수배가 되어있다’라고도 했다…….(「조교조 뉴스」제8호)

이 자그만 현실 속에서도 전쟁에 학대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민족을 초월한 정감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껴지는데, 아무리 가혹한 채찍으로 해도 지울 수 없는 불굴의 민족의 숨결이 있었으므로 제국주의에 순종하는 동맹자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에서의 노동자 징발 수법-그것은 참말로 전세기의 백인의 ‘흑인 사냥’을 생각하게 하는 야만 바로 그것이었다.

 

“납득시켜 응모를 시키고서는 그 예정한 수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군이나 면 등의 노무계가 심야나 새벽에 돌연 남자가 있는 집 잠자리를 침입하여, 혹은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중에 트럭을 돌려서 어떻든 그것에 태워 그들을 집단으로 편성하고, 홋카이도(北海道)나 규슈(九州)의 탄광으로 보내는 책임을 다한다고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가마다사와이치로(鎌田澤一郞)『조선신화(朝鮮新話)』)

 

그러나 아무리 약탈적인 동원을 행한다고 해도, 노동력 공급원천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다. 조선에서 군수산업 노동력 수요도가 강해짐에 따라, 일본 본토 본위의 동원계획 간에는 종종 모순이 생겼다. 그것을 조정하기 위하여 1942년 2월에는 조선노무협회가 성립되고, ‘조선인 내지(內地) 이입 알선요강’이 제정되어, 소위 ‘관 알선제’가 실시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으로의 노동자모집 지역으로는 일단 종래의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그 외에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이 더해졌다.

이러한 강제 노무동원은 가축류 공출과 어우러져서 농업 생산력에 막대한 파괴를 가져오는 모순을 낳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으로의 조선인 도항은, 종래의 식민지정책에 의한 피동적인 유출 형식에서 일변하여, 1939년부터 집단적, 조직적인 징발 형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실로 1940년대의 5년간에 100만 명 가까운 조선인이 강제적으로 이동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의 재일조선인 인구수는 대략 2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더하여 전시 중 육해군인, 군속으로서 강제적으로 끌려간 자가 36만5,263명[일본복원국(日本復員局) 조사]에 이르고 있다.

일찍이 천수백년 역사에서 대륙문화의 신선한 공기를 아낌없이 불어 보낸 현해탄은 금세기의 전반기를 그 후예들의 다 퍼내지 못할 분노와 슬픔 일색으로 물들여지고 말았다.

 

 

지은이 약력


 

강재언(姜在彦)은 오사카 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학) 연구과를 수료하고 교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교토에 있는 하나소노대학(花園大學)의 객원교수로 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일본에 살면서 일본 학계를 주도해온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공인 한국 근대사상사에 관한 연구는 1996년에 간행된 『강재언 저작선』(전5권)에 수록되어있다.

이밖에도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길사에서 펴낸『한국의 근대 사상』『선비의 나라 한국 유학 2천년』을 비롯하여『한국 근대사 연구』『한국의 개화사상』『조선의 서학사』『서양과 조선』『한일 교류사』『재일 한국․조선인-역사와 전망』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