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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13,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야기 (5/5)

간천(澗泉) naganchun 2024. 8. 30. 03:53

13,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야기 (5/5)

 

 

5, 지동설의 발표와 죽음

 

1529년경부터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에 관한 논고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차례 수정하고 보완했지만 이를 출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친구들을 통해 이 시기에는 상당히 알려지게 되었고, 1533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7Clemens VII, 1478-1534에게도 이 생각이 전달되었다. 1535년에는 바포프스키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와 지동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1536년에는 추기경 중 한 명인 니콜라스 쉔베르크(Nikolaus von Schönberg , 14721537) 가 코페르니쿠스에게 찬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때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출판할 의향이 없었다. 당시 헬문노의 주교가 된 친구 기제는 여러 차례 출판을 권유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1539,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인 게오르크 레티쿠스George Joachim Rheticus / Rhäticus, Rhetikus, 1514-1574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가 지동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제자가 되기를 요청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빠르게 흡수함과 동시에, 이 이론의 출판을 강력히 권유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도 마음을 돌려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539, 레티쿠스는 자신의 천문학 스승인 요하네스 쉐너Johannes Schöner14771547에게 긴 편지를 보내 그 안에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요약을 담았다. 레티쿠스는 이 편지의 사본을 그단스크의 출판업자에게 가져갔고, 1540년에는 최초의 보고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요약을 널리 알리며 완성본의 출판을 예고했다. 코페르니쿠스와 레티쿠스는 이론의 검토를 진행했으며, 1542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저작이 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초고가 완성되어 뉘른베르크의 인쇄업자인 요하네스 페트레이우스의 손에서 인쇄되었다. 하지만 이때 레티쿠스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초청되었기 때문에, 레티쿠스는 루터파 신학자인 안드레아스 오지안더 (Andreas Osiander, 1498-1552) 에게 교정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이 이론은 출판을 앞두게 되었으나, 154211월에 코페르니쿠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완성된 교정본은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날 그에게 도착했다고 한다. 1543524, 코페르니쿠스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코페르니쿠스는 사망 후에 매장되었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세기 동안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무덤을 찾아 헤맸다. 이러한 상황에서, 슈체친 대학교 등을 포함한 연구팀이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근무지였던 프롬보르크 대성당에서 2004년부터 발굴을 진행하였고, 대성당 깊이 약 2미터 지점에서 2005년 여름에 유골을 발견했다. 이 유골은 초상화와 두개골이 매우 닮아 있었고, 시대와 연령도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이 유골이 코페르니쿠스의 것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811, 슈체친 대학교와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가 공동으로 이 유골과 웁살라 대학교에서 4세기 이상 보관되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책 사이에 끼어 있던 두 가닥의 머리카락에 대한 DNA 감정을 실시한 결과, 양쪽의 DNA가 일치하여 이 유골이 코페르니쿠스의 것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위키페디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