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일
가을바람이 불면 옛날 땔감인 <촐(꼴) 베는 날>이 생각난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1940년대 후반 내가 초등학교 시절 땔감인 촐 베기(꼴 베기) 이야기이다.
처서가 지나면 한여름 지겹던 더위도 풀이 꺾여 한결 더움이 가시고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조 밭에는 탐스러운 조 이삭이 고개를 숙여 가을바람에 흔들거리고, 조밭 둘레에는 수수 이삭이 거무죽죽하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흔들거리거나 어떤 것은 뻣뻣하게 솟아올라 탐스럽게 보인다.
이 무렵이 되면 농가에서는 한겨울 마소를 먹이기 위하여 혹은 땔감을 위하여 꼴을 베는 시기가 된다. 동네 대장간은 낫을 만들거나 벼르기 위하여 분주해진다. 집집마다 남정네들은 분주하게 낫을 갈고 꼴 베기 준비에 바쁘다. 꼴을 베는 <낫>이란 보통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이 아니라 낫 길이가 40센티미터는 되고 자루는 한 발 반쯤 되는 것으로 서서 꼴을 베기 위한 연장이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 긴 낫만을 <낫>이라 이름하고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은 <호미>라 한다. 남정네들은 주로 이 긴 낫을 가지고 서서 하루 종일 꼴을 벤다. 그 능률이란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질(좀호미질이라 한다)의 수십 배는 더할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어 꼴을 베는 시기가 되면 어린 마음이라 언제면 꼴 베는 날이 올 것인가 하고 기다려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꼴 베는 날 새벽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산해진미의 반찬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보통 때는 구경도 못하는 흰쌀밥에 팥을 섞은 밥이 나오고, 돼지고기도 추렴하여 반찬으로 나오고,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게다가 끝물 고춧잎과 들깨 열매 줄기를 넣은 부침개가 나온다. 물론 고소리에서 짜낸 술도 한 병 준비된다. 한 겨울을 따뜻이 나게 하는 땔감을 준비하는 중대사라는 점도 있겠지만 꼴을 베는 일꾼에 대하여 후하게 대접을 하려는 어머니의 배려가 더 크다.
산야의 풀들도 푸른빛이 바래서 누른빛을 띠기 시작하고 넓은 들판 듬성듬성 경작지에는 하얀 메밀꽃이 한창 피어서 향기가 그윽하고, 스르륵스르륵 소리를 내며 푸른 풀을 베는 낫질 끝마다 꼴이 베어 눕혀지는데, 풀 냄새가 그리도 향기로웠다.
꼴을 베고 나면 일주일쯤은 말리고 다음에는 운반하기 위하여 꼴단을 묶는다. 한 아름 정도씩 묶어서 마소가 많은 집에서는 수 100여 바리, 한 <바리>는 한 아름 정도의 묶음 30단을 말한다. 마소가 없는 집에서도 30바리 정도는 해야 한 겨울을 날 수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낫꾼을 빌고 또 꼴단을 묶는 사람도 인부를 빌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 꼴단을 묶을 때와 베어서 묶어 놓은 꼴을 집으로 운반할 때는 어린아이라도 한 몫을 하게 되므로 학교를 쉬고 들로 나간다. 물론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가게 마련이다. 어린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마른 꼴을 한 묶음 정도씩 한 자리에 모으는 일과 묶인 꼴단을 한 자리로 모으는 일이다. 처음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마음으로 즐거워했으나 얼마 일을 아니하고 지겨워지고 언제면 저 해가 기울게 되나 하고 시간이 빨리 가기만 바라며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한나절이 지나면 가을 해는 짧아서 어느새 일을 마칠 시간이 되고, 모아 놓은 꼴 묶음은 산처럼 쌓이게 된다. 쌓인 꼴 묶음은 집으로 운반해야 하는데 마차가 있어야 하므로 다시 운반하는 일꾼을 빌릴 수 있을 때까지 그 꼴 묶음을 쌓아두어야 했다. 이 일을 <눌(짚을 둥글게 쌓은 것)을 눈다.>고 하는데 집에 운반한 후에도 이런 방법으로 <눌을 눌어서> 한 묶음씩 빼내어 썼다.
지금은 가스나 석유가 장사꾼의 배달로 땔감이 되고, 기계로 베어낸 목초는 비닐로 포장하여 비축했다가 가축이 사료가 되는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다.
옛날,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그야말로 지금은 단군 이래 최고로 살기좋은 태평성대의 시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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