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제2차 북벌(1)
1, 후 출사표(出師表)
후 출사표는 공명이 제2차 북벌에 출진하기 직전에 황제 유선(劉禪)에게 제출한 결의 표명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 대해서는 <후세의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그 근거는 이 글이 <정사>(초일급사료)가 아니라 오나라의 중신 장엄(張(嚴)이 지은 <묵기(默記)>(2급사료)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사>에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수(陳壽)가 당시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수는 망국인 촉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유비(劉備)나 공명(公明)에 대해서 좋게 쓰고 싶은데 그가 벼슬하고 있는 진(晉) 왕조가 위나라의 후계국가이기 때문에 너무 노골적으로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전 출사표>를 싣는 것만도 힘들었을 것이다.
후 출사표(出師表)
고문진보(古文眞寶)에서
후출사표(後出師表)
선제께서 염려하시기를, 한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고, 진실로 알고 계시기를 신이 역적을 치는 데에, 저의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또한 왕업이 망할 것이니, 다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누구와 더불어 그것을 치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그와 같은 선제의 명을 받은 뒤로,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아니했습니다.
생각하기를 북으로 위(魏)를 치려하면, 마땅히 먼저 남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5월에는 노수(瀘水)를 건너,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신이 자신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지만, 왕업을 돌아보니 성도(成都)에서 만족해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했었습니다.
이제 적은 마침 서쪽에서 지쳐 있고, 동쪽에서도 오(吳) 나라에게 힘을 다 쓴 끝입니다.
병법에, 적이 피로한 틈을 타라고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그 일에 관해 삼가 아뢰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제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나 달과 같고, 곁에서 돕는 신하들은 그 슬기로움이 깊은 못과 같습니다.
그러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張良)이나 진평(陳平)만 못 하시면서도, 긴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시며,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아직 알지 못할 첫 번째 일입니다.
유요(劉繇)와 왕랑(王郎)은, 모두 일찍이 큰 고을을 차지하여, 평안함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는, 걸핏하면 성인의 말을 인용하지만, 여러 의문은 뱃속에 가득하고,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이 꽉 메게 했을 뿐입니다.
금년에도 싸우지 아니하고, 명년에도 싸우러 가지 않다가, 마침내는 손권(孫權)이 앉은 채로, 마침내 강동(江東)을 차지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풀지 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조조(曹操)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그 군사를 부림에는, 손자(孫子) 오자(吳子)를 닮았으나, 남양(南陽)에서 곤궁에 빠지고, 오소(烏巢)에서 험한 꼴을 당하였으며, 기련(祁連)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여양(黎陽)에서 쫓기고, 북산(北山)에서 거의 패망하고, 동관(潼關)에서는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한 뒤에야 한때의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하들이 재주도 약하면서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것이, 신이 아직도 알지 못할 세 번째 일입니다.
조조는 다섯 번 창패(昌覇)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沼湖)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李服)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하후(夏候)에게 맡겼으나 하후(夏候)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가 능력 있어 할 수 있다고 하였어도, 오히려 그와 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과 같이 무디고 재주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반드시 이기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네 번째 일입니다.
신이 한중(漢中)에 온 때부터, 한 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운(趙雲)· 양군(陽群)· 마옥(馬玉)· 염지(閻芝)와, 정립(丁立)· 백수(白壽)· 유합(劉郃)· 등동(鄧銅)과, 부(部)나 곡(曲)에 주둔하는 장수 일흔 여명과, 가로 막는 적이 없이 돌진한 장군이, 빈수(賓叟)· 청강(靑羌)이며 산기(散騎)·무기(武騎)등 일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여러 지방에서 모아들인 정예병이요, 한 고을에서 얻을 수 있는 병사들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 셋 중에 둘은 줄어들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다섯 번째 일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면, 머물러 방어하는 것이나 나아가 싸우는 것이나, 그 노력과 비용은 같아서,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으로, 적과 지구전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여섯 번째 일입니다.
무릇 어려움을 평정하는 일은 하나의 큰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楚) 땅에서 싸움에 패전하셨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조(曹操)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월(吳越)과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파촉(巴蜀)을 점령하고, 군사를 이끌고 북쪽을 정벌하여, 마침내는 하후(夏候)에게서 목을 내놓게 되었으니,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서, 우리 한나라의 천하통일 과업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그러한 뒤에 오(吳)가 다시 맹약을 어겨, 관우(關羽)는 싸움에 져서 죽고, 선제께서는 자귀(秭歸)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조비(曹丕)는 다시 천자를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일이 이와 같아, 미리 헤아려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은 뒤에야 그만둘 뿐입니다.
이루고 못 이루는 것과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신의 총명으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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