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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칸(Isadora Duncan, 1877-1927)

간천(澗泉) naganchun 2018. 11. 17. 18:52



이사도라 던칸(Isadora Duncan, 1877-1927



이사도라 던칸

 


 이사도라 덩컨은 1877년 5월 26일 샌프란시스코의 명문에서 태어났다. 동년 10월 아버지가 경영하는 은행이 도산되고 얼마 후에 양친은 이혼하여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였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 4명 키워야 하는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오빠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여 일하고 어린 이사도라와 그 언니 엘리사베스도 근처의 어린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이사도라는 무용 레슨과 학교에 있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해변을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밀려오고 되돌아가는 파도치는 모습을 보면서 무용에 대한 최초의 영감이 떠올랐다고 후에 말하고 있다.

  이사도라는 후랑소아 델사르트((François Delsarte, 1811-1871=오페라가수)가 제창한 몸의 움직임의 이론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란 신체구조와 중력, 그 양방이 조화한 것이라는 것이 후랑소와 델사르트의 생각이었다. 프랑스의 델사르트를 지지한 미국인에는 그리스풍의 로프로 몸을 싸고 표정이 풍부한 제스쳐를 섞은 세리프를 낭독하기나 댄스나 강연활동을 한 리차드 호비 부인(Mrs. Richard Hovie) 등이 있었다.(이 무렵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리스 리바이발(Greek revival)이 예술계에 일고 있었다.)
델사르트의 이론이나 그리스풍 복장(costume) 은 이사도라 독자의 무용예술이 발전해가는 과정에 영향을 끼쳐가게 되었다.

1890년 13세인 이사도라는 최초의 댄스 리사이틀을 오크란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가의 4명의 형제자매들은 사교댄스도 가르치게 되었다. 월츠, 폴카, 쇼디슈(폴카 비슷한 박자의 윤무) 등이다. 유명한 유럽의 가극단이 공연 여행차 유명한 무대배우들도 왔다. 덩컨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모든 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장남인 오거스틴(Augustine=후에 유명 배우가 되었다.)이 선두에서서 일가로써 연극을 상연하여 캘리포니아 연안 고을마다 공연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이사도라와 어머니는 시카고에 들렀다. 거기서 단기간 댄스 일을 하고 지방 순회공연으로 와 있던 뉴욕의 연극 프로듀서 오거스틴 데일리(Augustin Daily) 극단에 고용되었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이사도라는 뉴욕에서 데일리가 연출하는 공연에 출연하여 조금의 댄싱을 추기도 하고 단역을 하기도 하였다. 또 사교계의 부인 댁에서 리사이틀을 열게 되어서
어머니의 피아노 반주로 언니인 엘리사베스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 1899년 어느 날 이사도라 등이 레슨을 하고 있던 빌딩에 화재가 났다. 다행히 어린이들을 전원 무사히 살릴 수가 있었지만 단칸 일가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모두 타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는 일가는 영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어린이들 부모에게 구원을 청하자 화재에서 구함을 받은 어린이들 부모는 그에 응해주어서 그 돈으로 가축선 배표를 사서 출항할 수 있었다.

  영국에 건너간 이사도라는 뉴갸라리에서 3회의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래서 음악평론가인 훌러 메이트란드(Fuller-Maitland)의 권으로 장중한 곡으로 춤을 추게 되었다. 이 무렵 이사도라는 오빠인 레이몬드와 함께 많은 시간을 대영박물관에서 보내고 그리스의 항아리나 파르테논의 벽화에 그려진 인물상을 연구하였다. 그 후에도 그녀는 파리, 베를린, 피렌체, 로마, 아테네의 미술관이나 교회, 사원 등에서 인물상을 연구하여 그 위대한 <움직임과 표현의 예술>에서 배운 것을 자신의 무용에 도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베를린에서의 강연
26세 때 베를린에서 행한 <미래의 댄스(The Dance of the Future)>라는 강연에서 이사도라는 자연이야말로 무용의 근원이라고 말하였다. 생물은 각각의 자연본능에 따라서 각각의 감정과 물리적 구조(곧 신체)에 의하여 움직인다. 미개인의 몸 움직임은 자연히 아름답고 그처럼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심플한 투니크(영-tunic=의복의 명칭으로서 길이가 긴 윗도리)와 산달을 신은 고대 그리스인의 동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움직임이 인공적으로 멈추거나 시작하거나 하여 포스를 지탱하거나 발가락 끝을 세워서 추거나하는 발레의 움직임은 자연운동과는 반대이다. 발레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착각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그 위에 발레는 몸을 비뚤어댄다. <도리코트(tricot)의 아래에서는 변형한 근육이 춤추거나... 근육 속에는 비뚤어진 뼈가 있다.> 또 이사도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여성의 미와 건강의 육성, 여성에게 본래 갖추어진 체력과 자연의 움직임을 되돌리는 것이다. 완전한 모성과 태어날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들의 문제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나의 동작을 본받으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동작을 하도록.. 미래의 댄서. 신시대의 신여성의 몸에 숨어있는 자유정신... 한없는 자유로운 몸에 깃들어있는 최고의 지성>

무용과 여성 운동
이 강연으로 이사도라는 여성운동과 노선을 함께 함과 동시에 무용이 어린이 교육에 필요불가결하고 건강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보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사도라는 베를린과 파리 그리고 러시아 혁명 후 모스크바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학교 학생들을 언니 엘리사베스의 보호 하에 미국으로 보냈다.
이사도라 사후 이사도라가 최초에 가르친 6명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이루마 던칸에게 인도되어 모스크바 학교의 학생들이 미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러시아 학생들이 소련으로 되돌아간 후에는 미국 학생들이 바뀌어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사도라의 작품은 이리하여 <이사도라 블루스.>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사도라 최초의 6명의 제자 안나, 이루마, 리사, 데리사, 마고, 에리카에게 승계되어 6명의 동기생이나 후계자들을 통하여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사도라의 안무
이사도라의 코리오그라피(choreography=댄스, 발레 등의 안무)는 어떤 것이며 무용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사도라의 서정적인 작품은 그 가벼움과 팔과 몸통의 파도처럼 흐르는 움직임이 특징적이었다. 드라마틱한 작품에는 갑자기 거친 움직임이나 비뚤어진 움직임을 도입한 것도 있다. <올페오(Orfeo)> 안의 <복수의 여신들의 춤>에서는 지면에 머리를 박고 마루위에 쓰러지고 있다. 마사 그라함(英: Martha Graham 1894-1991, 미국무용가, 안무사)과 매리 위크만(Mary Wigman、1886 – 1973, 독일 안무사)과 함께 <마루를 발견한 무용가>라고 말하는데 이 발견은 중력이 무용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사도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이사도라가 강조한 자연스러운 움직임, 흐르는 것 같은 표정 풍부한 움직임은 미하일 포킹 (러-Michel Mikhailovich Fokine 1880~1942, 러시아 댄서, 안무사), 튜더(Tudor, 1909-1987 뉴욕, 영국 무용가 안무사), 프레드릭 아슈톤(Sir Frederick William Mallandaine Ashton, 1904–1988, 영국 무용가, 안무사) 등의 발레안무가에게도 자극을 주어서 그녀 자신이나 로이 풀러(Loie Fuller, 1862–1928, 미국 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  (Ruth St. Denis 1879−1968, 미국 무용가), 테드 숀(Ted Shawn ,1891-1972, 미국 무용가, 안무사) 등의 다양한 선구자 밑에서 당시 싹트기 시작한 <모던 댄스>의 영역을 넓혔다.
이사도라는 사회적, 정치적인 테마에 근거한 작품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고무된 라 마르세예스(仏불- La Marseillaise), 러시아혁명을 제재로 한 <스라브행진곡> 등이 있다. 소련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무렵에는 노동과 혁명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들 작품은 많은 무용가 e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사도라와 모던 댄스
이사도라의 전례에 따라 오늘날 무용은 많은 학교에서 일반 커리큐럼에 들어 있다. 거기서는 무용은 단순한 체조가 아니라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체험으로서 취해지고 있다. 다시 이사도라ㅡ자신의 작품은 그녀가 죽은 후 일시는 소멸된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다시 극장에서 상연됨으로써 현재 관객에게나 비펑가에게도 열심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사도라가 쓴 수법, 그 최소한의 의상이나 장치, 그 서정성이나 표현의 풍부함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모던댄스는 이사도라의 생각을 기축으로 하여 생겨났다. 발레의 세계에도 음악적 심리적인 진실을 강조한 이사도라의 생각이 침투되고 있다. 이사도라 이전의 세계에서는 무용은 단순한 오락이라 간주되었으나 이사도라는 무용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출처= 프레디카 블레아(Freddica Blair) 저
『춤추는 비너스-아서도라 던칸의 생애』-마쓰요 나오코(松代尚子) 역 


애정 편력과 죽음
이사도라 덩컨의 춤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흥미로운 사랑 이야기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에 극적인 효과를 더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이라는 뼈아픈 기억으로 인해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으나 운명은 그녀를 당대 천재들과의 불꽃같은 사랑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영국 출신의 연극연출가인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 사이에서 딸을, 미국 출신의 재력가인 패리스 싱어(Paris Singer)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사랑은 반짝 피어오르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불꽃처럼 오래 가지 못하였고 1913년에는 사랑하는 두 아이들마저 파리에서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황망히 떠나보내는 불행이 이어졌다. 이후 절망적인 심경으로 향하여 러시아에서 만난 17세 연하의 천재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Sergei Yesenin)과의 결혼으로 이사도라 덩컨의 불행은 마침표를 찍는 듯했으나 이는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하였다. 그 남편은 결혼 후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925년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한편의 영화 같은 이사도라 덩컨’에서)


이사도라의 죽음
1927년 9월 14일 프랑스의 니스(Nice) 해변에서 한 skatd과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자신이 매고 있던 긴 스카프가 자동차의 뒷바퀴에 감기어 이사도라는 전도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향년 49세였다. 이사도라의 유해는 화장되어 파리의 베루 라슈즈 묘지에 매장되었다.


일화
어느 날 이사도라 덩컨은 영국 유명 작가인 버나드 쇼에게 청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두뇌와 나의 육체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그에 대해서 버나드 쇼는 <나의 육체와 당신의 두뇌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큰일입니다.>하고 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