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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 전설/길가메시 서사시

● <길가메시> 서사시에 대하여

간천(澗泉) naganchun 2009. 8. 12. 21:53

一, 길가메시 서사시

 

 

 

● <길가메시> 서사시에 대하여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서사시. 구약성서의 <노아의 홍수>의 원형을 포함하고 있고,반신 반인의 영웅 길가메시의 위업과 불로초를 구하는 이야기

 

 

1. <길가메시(Gilgamesh)>란

 

<길가메시>는 기원전 2600년경 슈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를 126년간 다스린 실재의 왕이다. 슈메르어로 읽으면 <비루가메시>인데 <길가메시>란 고바빌로니아어 이후의 독음이다.

이 서사시에서 그는 <루가루반다>와 <닌순> 사이의 아들로서 <그의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사람>이라고 반신반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서사시의 에피소드의 많은 것은 기원전 30세기말에는 슈메르어로 성립되었었다고 생각되고, 이로부터 윤색되어서 기원전 20세기 처음의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아카드>어에 의하여 서사시로서 성립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2. <길가메시>서사시의 발견과 연구

 

문명발상지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와 문화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잊어버렸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쓰던 문자 <설형문자>를 독해하기 시작하여 되살아났다.

 

다시 고대 페르샤어, 바빌로니아어, 에라므어의 3언어가 설형문자에 의하여 병기 되어있는 <다레이오스>왕의 <베히스툰>각문(刻文(The Behistun Incription))이 헨리 크로스위크 로린손(Sir Henry Creswicke Rawlinson、1810―95)에 의하여 채집, 연구 된 것으로 바빌로니아어(신서체설형문자)의 해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앗시리아어의 해독으로 이어져간다.

 

 

1845년 프랑스의 파울 에밀 보타(Paul Emil Botta)가 쿠르사바드(Khursabad )에서 앗시리아왕 사루곤 2세의 성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영국의 헨리 오스틴 레야드(Austin Henry Layard(1817~1894)가 니네베(Nineveh), 님루드(Nimrud), 앗슈르(Assur)를 차례차례로 발굴하여 발굴 유물을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이때 설형문자로 덮인 점토편이 대량 발견되었다. 이것이 앗시리아어 설형문지인 듯하다 하여 학자들이 일제히 해독에 달려들었다. 바빌로니아어와 앗시리아어는 같은 셈어족에 속하므로 해독은 용이했다.

 

1858년에 마침내 아카드어(Akkadian)(바빌로니아어나 앗시리아어 등 오리엔트 권에서 사용된 셈어계언어)가 해독되었다.

 

 

1872년에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1840-1876)는 대영박물관에서 여느 때와 같이 앗시리아어의 유물 수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앗시리아학에 매우 흥미가 있어서 설형문자도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에 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그는 니네베에서 발굴된 앗슈르바니팔(Ashurbanipal)왕궁 도서관의 점토판 문서의 단편을 정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기묘한 단편을 발견하였다

그 단편은 반으로 깨어져 있었는데, 원래는 6개의 난을 가지고 있던 점토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제3란에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방주가 니실산에 표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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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둘기를 날렸다.

비둘기는 날아갔는데 되돌아왔다.

쉴 장소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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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는 곧 이것은 <노아의 홍수>의 일부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해 12월에 스미스는 이 발견을 학회에 발표하고 그것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서판은 불완전했으므로 그 앞은 알 수 없었으나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지가 자금을 제공하여 스미스는 익년 니네베에 가서 다행히 결락부분 17행의 점토판을 발견하였다. 그는 세 번이나 니네베를 찾아갔다. 그래서 많은 문서를 발견하였는데 몸을 혹사하였기 때문에 아렛포(Aleppo)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흥미 깊은 문서의 독해가 시작되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최초에는 <니므롯>이라 불렀다. 구약성서 창세기 10장에 있는 <사냥꾼 니므롯>이라는 영웅에 비정된 것이다. 당시의 인명은 표의문자로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바른 독음은 알기 어렵다. 당초에는 <이즈도우바르> <기슈디바르> 등으로 읽었다.

 

1891년에 핀체스(Eninor J Pinczes)에 의하여 <길가메시>라고 읽게 되어 이후에는 이것이 바른 것으로 되었다.

 

또 위에서 말한 앗시리아어판 만이 아니라 그것보다 일찍이 성립된 고바빌로니아어판, 슈메르어판, 또 힛타이트어판, 후리어판 등의 단편이 다른 곳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이것에 의하여 앗시리아어판의 결락부분이 보완됨과 동시에 시대에 따른 내용의 변천 등이 밝혀졌다. 그리고 서사시연구가 더 진전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