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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위,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

간천(澗泉) naganchun 2024. 2. 28. 03:17

제9위,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

 

율리우스 카이사르 흉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 Gaius Iulius CaesarJulius, BC100-BC44)는 공화정 로마 말기의 정무관이며 문필가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jacta est). <왓다, 보았다. 이겼다.>(veni, vidi, vici). <브르트스 너도인가?>(et tu, Brute?) 등의 특징적인 인용구로도 유명하다.

또 그가 포고한 그의 이름이 붙은(율리우스력)은 기원전 45년부터 1582년까지 1600년 동안 유럽의 전 지역에서 시용되었다.

 

고대 로마에서 최대의 야심가라고 알려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라틴어 ; Marcus Licinius Crassus, BC115-BC53, 공화정시대의 정무관)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라틴어 ; Gnaeus Pompeius Magnus, BC106-BC48) 공화정 후기의 정무관)와의 제1회 삼두정치와 내전을 거친 영구독재관이다. <카이사르>의 이름은 제정초기에 로마황제가 가지는 칭호의 하나로 제정 후기에는 부제의 칭호가 되었다. 독일어의 카이자(Kaiser)나 러시아어의 차르(царь) 등 황제를 나타내는 말의 어원은 이기서 유래한다.(키페디아)

 

카이사르의 공적은 여러 가지인데 현재의 유럽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카이사르는 가리아 지방을 원정하여 거기를 로마화하였는데 그 가리아지방이야말로 현재의 프랑스이고 프랑스의 문화는 로마가 밑받침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윈스톤 처칠은 <영국의 역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국 상륙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데 영국이 현재에도 로마의 역사나 정치제도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도 역시 카이사르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는 내란의 1세기라는 로마의 내란시대를 진압하고 황제가 되기 바로 전에 원로원 의원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그러나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초대황제가 되고 이후 황제의 이름에는 <카이사르>의 이름이 붙게 되어서 러시아어에서는 <차르>, 독일어에서는 <카이자>라 하고, 다시 7월을 나타내는 <july>라는 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나오고 있어서 로마를 통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역사가 데오도르 모무젠Theodor Mommsen1817-1903, 독일 역사가, 법학자, 정치가.)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평하였다.

출처=f:id:myworldhistoryblog:20190622234257j:pl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