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계몽활동의 추억
지금은 우리나라가 GDP 33,434달러로 세계 9번째(2019년 한국은행자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우리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풍요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농촌 계몽활동을 했던 1950년대 우리나라는 인구의 8할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이었으나 농촌은 매우 피폐하였다. 학자의 연구(김종덕)에 의하면, 식량 자급률은 50%가 안 되었고 농가 호당 부채는 300만 원 정도이며 소작농이 전 농가의 50%를 차지한다고 했다. 특히나 제주도의 경우 농토가 협소하고 척박하다. 그런 중에도 나의 고향은 더 심각했다. 한편 초등학교 취학률은 96% 정도에 이르지만, 중학교 진학률은 60%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당시 자라나는 농촌의 청소년들은 어떠했는가? 빈한한 생활에 학교교육은 더 바랄 수 없다. 겨우 초등학교를 나오고, 그저 농촌에서 지내는 소년소녀가 무려 4백만이나 된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농사일을 할 만한 체력은 없거니와 자기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도 없다. “시에 있는 철이가 맘보바지를 입었는데 근사하더군. 나도 그것을 입어보아야지.? 유행만을 따라야 되는 것처럼 날뛴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닌 패들은 늘어가는 것이 투전, 술 마시기, 닭 훔치기, 힘쓰기가 일수이며 심지어는 강간에서 살인이라는 무서운 범죄까지를 일으키는 소년이 있음은 괴롭고 쓸쓸해지기만 하는 농촌에 놀라운 일이며 커다란 교육문제이며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학생에겐 학교가 일거리를 주건만 학교 밖에 있는 소년소녀들에겐 할 일이 없었다. 힘들여 일하기만 하면 농사일도 하겠건만 당시 젊은이는 일 아니하는 것이 예사가 되고, 아버지 어머니도 과히 서두르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농촌은 헐어만 가고, 내일의 농토를 지킬 일군은 날로 줄어만 갈뿐이었다. 농촌이 헐어서 우리나라가 잘 될 수 없으며, 농촌의 소년소녀가 이처럼 정체와 퇴폐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농촌이 부해질 수 없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농사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청소년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탈에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가 바로 농촌의 소년소녀를 바로 보고 바로 계도해야 될 때이며, 농촌의 유지들이 바로 깰 때이다. 이 소년소녀들에게 바람직한 일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겠다. 내일의 비옥한 농토를 지킬 일군을 만들어야 하겠다. 단연코 이 소년소녀를 올바로 선도하고 일거리를 주어 내일의 농토를 지킬 일군을 만드는 사회교육 방법은 4H클럽 활동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57년 10월에 군에서 제대하여 1958년 3월 복직 발령이 나기까지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기간을 이용하여 4H클럽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당시 북제주군 농촌지도소의 김병오 지도사의 도움을 받아 동네 청소년을 모아 4H클럽을 조직해 지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모여 같이 활동하였으나 점차 전 마을로 확대되어 회원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농촌 청소년지도 운동(활동) 단체인 ‘4H클럽’이란 ‘4H’는 영어의 head(지성), heart(덕성), hand(근로), health(건강)에서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다.
그 정신은
“나는 나의 클럽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나라를 위하여,
나의 머리(Head)를 더 명철하게 생각하는 데,
나의 가슴(Heart)을 더 위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데,
나의 손(Hand)을 더 큰 봉사를 하는 데,
나의 건강(Health)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다.”
라는 ‘클럽 참가자의 맹세’처럼 지(知), 덕(德), 기(技), 건(健) 이 네 가지를 육성 배양하는 사회교육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주로 권장한 것은 닭과 토끼 사육하기, 화단 가꾸기, 동네 도로변의 풀베기, 쓰레기 버리기, 급수활동 등을 권장하고 나 스스로 염소를 기르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에 발행되었던 ?새농민?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보급되던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도 하였다.
노래는 배민수 작사라고 기억되는데 그 가사를 옮기면 이렇다.
저 건너 푸른 봉에 구름 걷히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시냇물 굽이굽이 감도는 들에
이슬 맞아 젖은 흙은 향기 풍긴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 주인이 너와 내로구나
또 자주 불렀던 노래는 배민수 작사 작곡인 「농부가」다.
하나님 주신 우리나라 편편옥토가 이 아닌가.
높은 데 갈면 밭이 되고 낮은 데 갈면 논이 된다.
에헤에야 상사디야.
그리고 김용기(金容基)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 이야기, 류달영(柳達永) 교수의 농촌운동과 남궁억(南宮檍) 선생의 「무궁화 보급운동」 이야기 등을 들려주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도록 권장했다. 또 원예와 목축으로 널리 알려진 덴마크의 농업 그리고 개척자 정신으로 광활한 농토를 경영하는 미국의 기계화 농업 이야기도 들려주곤 하였다.
한편 당시 제주신문에 「농촌부흥과 4H클럽」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식자들의 호응을 호소하기 하였었다.
농촌지도소 김병오 지도사를 통하여 인근 부락인 세화, 하도에서도 이 활동이 활발해져서 이들의 연합으로 구좌면 4H클럽연합회를 조직해 지도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교회를 마을에 유치하고 청소년을 교인으로 전도하여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농촌이 조금이라도 계몽되기를 바랐다. 나는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어서 실제 활동을 하였다. 그때 이 교회활동에 참가했던 청소년들은 장성하여 공무원으로 활동한 사람이 많고 지금은 70대 노인이 되었다.
또 당시 제주에는 제주시에 우생당이라는 서점이 하나 있을 정도로서 농촌에서는 책을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마침 북제주군교육청에서 농촌문고를 보급한다고 해서 이를 하도리에 유치하였다. 이 농촌문고는 하도리에 거주하는 홍희구 씨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여 농촌에 독서운동을 펼치기도 하다.
지금부터 60년 전 이야기이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농촌이 놓인 형편이 그러하였고 농촌에서는 사회문제인 청소년 지도가 절실했다. 그에 적절하고 절대로 필요한 것이 ‘4H 클럽운동’ 이라고 생각했고 고루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개조하기 위한 계몽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었다.
1980년 중반 내가 서울에서 살 때이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의 변두리였던 갈현동 친구네 집들이 잔치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술잔이 오가면서 취흥이 무르익자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자 그 주변 들판에서 벼가 자라는 것을 보고, 세월의 지층에 묻힌 젊은 날의 감성을 자극했는지 갑자기 4H 클럽활동을 할 때 부르던 「농부가」 가락이 흘러나왔다.
“저 건너 푸른 봉에 구름 걷히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많고 많은 노래들 중에 어쩌다 그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 이 노래를 듣고 동석했던 동료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서울이야 서울!” 하고 장난 섞인 핀잔을 들은 일이 있다. 벌써 30년도 지난 그 시점에 농촌도 아닌 도시 서울에서 어쩌면 그 노래를 연상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스스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농촌 운동이 재미있었나 하고 혼자서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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